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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9講 讚頌드리는 生活
전홍엽  2018-08-09 18:32:34, 조회 : 648, 추천 : 129

第9講
讚頌드리는 生活
행 16:16-34
16○우리가 祈禱하는 곳에 가다가 占하는 鬼神 들린 女종 하나를 만나니 占으로 그 主人들을 크게 利하게 하는 者라 17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至極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救援의 길을 너희에게 傳하는 者라 하며 18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甚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鬼神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命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鬼神이 卽時 나오니라 19○종의 主人들은 自己 利益의 所望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官員들에게 끌어 갔다가 20上官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人인데 우리 城을 甚히 擾亂케 하여 21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行치도 못할 風俗을 傳한다 하거늘 22무리가 一齊히 일어나 訟事하니 上官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많이 친 後에 獄에 가두고 看守에게 吩咐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그가 이러한 令을 받아 저희를 깊은 獄에 가두고 그 발을 着錮에 든든히 채웠더니 25밤中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祈禱하고 하나님을 讚美하매 罪囚들이 듣더라26이에 忽然히 큰 地震이 나서 獄터가 움직이고 門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看守가 자다가 깨어 獄門들이 열린 것을 보고 罪囚들이 逃亡한 줄 생각하고 劍을 빼어 自決하려 하거늘 28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傷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看守가 燈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俯伏하고 30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先生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救援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31가로되 主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救援을 얻으리라 하고 32主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傳하더라 33밤 그 時에 看守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自己와 그 眷屬이 다 洗禮를 받은 後 34저희를 데리고 자기(自己) 집에 올라가서 음식(飮食)을 차려 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

바울과 실라의 獄中 讚美
使徒行傳 16:11-40 內容은 使徒 바울 先生이 두번째로 傳道 旅行을 하실 때, 처음으로 아시아도를 떠나서 유럽으로 들어갔는데, 그 곳은 헬라의 마게도냐 땅이었습니다. 그 마게도냐의 빌립보라는 곳에 이르러서 傳道한 이야기입니다.
傳道를 할 때 占하는 鬼神들린 女子를 하나 만나, 그 女子를 낫게 해 준 일이 있습니다. 그때 이 종의 主人들이 그 占하는 女子가 占鬼神에게서 解放된 것을 보고, 自己네의 利益과 所望이 끊어졌다하여 바울과 실라를 잡아 큰 距離로 官員들에게 끌어갔다가 上官들앞에 데리고 가서 訟事하였는데, 그 訟事만 듣고 上官들이 덮어놓고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버리고 매로 치라고 해서 많이 맞았습니다. 참으로 苦痛스럽고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이 때린 後에 獄에다 가뒀고, 看守에게 吩咐해서 든든히 지키라고 했습니다.
깊은 獄에 갇혔다는 것은 그저 아무라도 脫獄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獄 가운데에서도 깊은 곳에, 或은 땅속 깊이 들어가 있는 獄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또 그 발은 着錮에 든든히 채워졌습니다. 매를 맞아서 몹시 아프고,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깊은 土窟과 같은 獄 속에 갇혀서 괴롬이 있는 때입니다. 물론 이것은 自己들의 잘못 이 아니고, 聖神님의 充滿한 能力으로 占하는 鬼神들린 여종을 그 鬼神에게서 解放해 주고 낫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理解가 相反되니까 그 여종의 主人들이 일어나서 텃세를 하고, 無理한 訟事를 해서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밤중쯤 되어서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 앞에 祈禱를 올리고, 呻吟소리 代身 하나님을 讚美했습니다. 讚美를 하되 하나님은 높으시고 거룩하시다고 둘만 얘기한 것이 아니고, 獄中에 있는 罪囚들이 다 들을 수 있게 讚美했습니다.
그때 忽然히 큰 地震이 나서 獄터가 움직이고 門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겨졌습니다. 獄門들이 열린 것을 보고 罪囚들이 다 逃亡친 줄 알고 看守는 칼을 빼서 自決을 하려 하였습니다. 그때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傷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 하였습니다. 이에 看守가 燈불을 달라고 해서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俯伏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先生님들, 제가 어떻게 해야 救援을 얻겠습니까?” 하고, 救援받을 길을 물었습니다.
이는 分明히 바울과 실라가 救援을 傳播하러 다니던 사람으로서 그것 때문에 이 獄에 갇힌 것을 看守도 아는 까닭입니다. 바울은 看守에게 “主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救援을 얻으리라” 했다고 누가는 報告합니다. 누가의 이 말은 대단히 簡略하지만 바울은 이 말의 意味를 좀더 仔細히 說明했을 것입니다. “主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傳하더라.” 이에 看守는 그들을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다 씻기고 自己뿐 아니라 自己 食口들이 다 洗禮를 받았고, 그들을 自己 집에 데리고 가서 飮食을 待接하고 저들이 다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그리고 날이 새니까 上官들이 衙前을 보내서 釋放하는 經緯가 나옵니다.

苦難받을 때도 讚美하라
여기서 特別히 배울 것은 使徒 바울 先生이 가장 苦生스런 時間에 祈禱와 讚頌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祈禱는 사람이 苦痛스러울 때 많이 합니다. 야고보서 5:13에 “너희 중에 苦難 當하는 者가 있느냐 저는 祈禱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讚頌할지니라”고 했는데, 마음 가운데 主님을 依支하는 거룩한 信仰이 가득한 바울과 실라가 가장 몸이 苦痛스럽고 어려운 時間이요, 環境이 가장 惡한 時間일지라도 主를 讚頌한 事實은 特別히 우리의 注目을 끕니다.
바울과 실라는 마게도니아에 있는 로마 植民地 빌립보 城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福音을 傳播하는 途中에 惡한 鬼神의 挑戰을 받고 이를 물리쳤습니다. 그 일로 因하여 無法한 로마 帝國 官憲에게 매를 많이 맞고 깊은 獄에 갇혔지만, 그 속에서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祈禱하고 하나님을 讚美하매 罪囚들이 듣더라”(행 16:25)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當場의 苦痛만을 크게 보지 않고 빌립보 城으로 引導하신 主님의 큰 뜻을 생각하고 主님의 거룩한 計劃의 進行에 自己들을 종으로 쓰시는 主님의 사랑과 特權을 느꼈을 것입니다. 特히 只今 받고 있는 患難은 主의 주신 使命을 遂行하는 길에 惡鬼가 뛰어들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關與하려고 하는 것을 絶對로 看過할 수 없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惡鬼를 쫓아낸 데서 發端한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종들이었기에 黑暗의 惡鬼가 거룩한 前進을 거스려 攻擊해 오니까 이런 狡猾하고 惡한 攻擊을 對敵하여 싸우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對戰해서 하나님께서 能力으로 敵對하는 黑暗의 勢力을 물리쳐 주시사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님의 榮光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그 占치는 婢子에게서 惡鬼를 逐出한 일에서 하나님의 權能이 榮華롭게 나타남을 歷歷히 보았던 터이므로 하나님께 感謝와 讚頌을 드리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한편 占하는 여종의 主人들, 오직 제 利益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權能의 威嚴을 못 보는 者들은 오직 目前의 財利의 줄이 끊어졌다는 것 때문에 敢히 하나님의 權能의 그릇 노릇을 했던 바울과 실라에게 報復을 하려고 로마 帝國의 植民地 官憲을 利用하였습니다. 많은 로마 市民들이 유대人에 對하여 가진 冷酷과 嫌惡, 거기에 로마 官憲의 對유대인 危壓 政策이 이 報復者들에게 有利한 자리를 주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城 政府 執政者들은 報復者들에게서 告發을 받자 더 알아볼 것도 없이 바울과 실라를 매로 많이 때린 後 깊은 獄 속에 마치 重大한 罪人 다루듯이 발에 着錮를 채워서 가두었습니다. 事件의 發端은 惡鬼가 그리스도의 福音의 前進을 해치려고 뛰어든 데에 있는 데 빌립보 城의 惡質 謀利輩와 로마 帝國의 威光을 등에 진 帝國官憲들까지 모두 惡鬼의 便이 되어 하나님 나라의 發展을 막으려하는 것을 볼 때 두 聖徒는 只今 自己들이 屬해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王과 그 榮光, 그 嚴威, 그 經綸을 다시 한번 생각하고 思慕하면서 이에 自己들이 얼마나 높고 빛나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가를 더욱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한 20年 前, 처음 그리스도 敎會가 설 때에 유대인의 公會와 元老들에게 매맞고 逼迫받은 使徒들은 “그 이름을 爲하여 凌辱받는 일에 合當한 者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公會앞을 떠나니라”(행 5:41)했는데, 이러한 精神이 바울과 실라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偉大한 思想家요 그리스도를 懇切히 사랑한 바울은 患難 中에서 더욱 그리스도의 智慧와 權能, 사랑, 公義, 威嚴을 生生히 느끼고 그 크신 經綸을 깊이 感歎하면서 主를 讚揚하고 主께 祈禱드렸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屬한 者는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主의 嚴威와 權能과 사랑을 더 생각하고 主께 祈禱하고, 讚頌 드리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께 上達되는 讚頌을 하라
大體로 讚頌이라 할 때는 重生한 사람이 敎會 나와서 처음에 여러 가지를 배울 때, 여러 사람과 함께 自己도 따라서 해야 하는 重要한 敎會 儀式의 하나로 생각할 것입니다. 여럿이 祈禱할 때 고개 숙여 같이 祈禱하고, 여럿이 讚頌할 때 따라서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普通 처음으로 예수 믿고 나오는 兄弟나 姉妹는 信者들이 讚頌을 부를 때 自己도 부르고 싶은 心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讚頌을 하는데 그 말의 뜻을 하나씩 하나씩 마음에 새기면서 부르면 마음에 참으로 기쁨을 준다는 것을 많이 느낄 것입니다. 처음엔 이렇게 讚頌을 부르고 나가지만, 不知不識間에 이전에는 “참 좋구나”하던 것이 차츰차츰 變해서, 이 말뜻을 “이젠 내가 안다”는 생각을 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이 그렇구나” 하게 되고, 다음에는 “讚頌은 讚頌이니까 부른다” 하는 식으로 變하는 일이 많습니다. 처음 믿었을 때 讚頌을 부르던 깊이와 즐거움, 마치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같은 그러한 것, 곧 마음을 感化시키고 마음에 平安과 滿足을 주는 그런 精神이 漸漸 사라지는 것을 經驗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讚頌은 무슨 飮食과 같이 처음에 먹었을 때는 맛있다가, 배부르면 맛이 없어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기도 쉽고, 그러한 식으로 맛보기도 쉽게 되어 있습니다. 讚頌은 처음에는 재미 있다가 漸漸 興味가 줄어드는 식으로 사람의 心情과 感覺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讚頌을 부를 때마다 聖神께서 크게 役事하셔서 恒常 새롭고, 能力 있는 것을 生水처럼 供給하되, 奇妙한 여러 가지 맛으로 供給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 안에 늘 있지만 하나님을 讚頌한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榮光이 뜻하는 것을 新鮮하고 새롭게 느끼면서 하지 못하는 까닭에 이미 한번 알고 느낀 일을 다시 反復해서 뒤적거리는 식으로 한다면 그 느낌이라는 것이 대단히 稀薄해지고 나중에는 거의 無感覺한 狀態에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宗敎的인 熱情으로 하면 그 맛이 恒常 遞減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感覺으로 맛있는 飮食을 먹을 때 飮食 맛이 漸漸 遞減하는 것같이, 精神 作用도 처음에는 맛있다가 차츰차츰 遞減하는 것을 많이 느낍니다. 讚頌도 같은 內容, 같은 말을 또 부르고 또 부르면 새로운 맛이 더 新鮮하게 增進할 까닭이 없습니다. 맛이 점점 減退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讚頌을 부르고 또 부르는 것이 得策이 아닌 것을 알지만 讚頌은 왜 이 말을 써서 불러야 하는지 그 理由가 明白하게 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냥 適當하게 한번 해 본다. 音樂이 興味가 있으니까 해 본다. 또 무슨 노래라도 한번 부르고 싶으니까 해 본다 한다면, 그것은 世上의 音樂 演奏는 可할는지 모르나 하나님을 讚頌하는 眞正한 讚頌은 그러한 動機나, 精神만으로는 不足한 것입니다. 이 말은, 이와 같은 態度가 世上에서 普通 노래를 부를 때도 不適當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讚頌은 그렇게 부르면 讚頌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讚頌歌에 있는 노래를 하나 부른다는 것은 마음의 慰勞도 되고 藝術的 感情을 채우는 일도 되겠지만, 그건 마치 어떤 다른 藝術 歌曲이나 다른 무엇하나를 擇해서 부르는 것과 비슷한 心情입니다. 讚頌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 할 때는 恒常 거기에 훨씬 다른 條件이 붙어 있는 것입니다.
다른 條件은 讚頌은 내가 불러서 足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들으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어떻게 부르든지 마음과 精誠을 다 드려서 부르면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한다면 그건 不適當한 생각입니다. 사람의 精誠도 갖가지이고 사람이 마음을 다하는 것도 差異가 많아서 사람이 보기에도 어떤 사람은 精誠이나 마음이 가득한 것 같고, 어떤 사람은 自己 딴에 精誠을 들였다고 하지만 傲慢無禮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甚히 不適當한 것도 있는 것을 判別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받은 敎養이나 敎育이나 環境 때문에 自己는 잘못한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잘못하는 것이 참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讚頌을 할 때도 저는 잘못 없이 精誠을 다해 제대로 한 줄 알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이 많고, 하나님의 法則에 벗어나는 일이 많이 있는 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사람이 하나님의 法則도 道理도 모르고 제멋대로 하면, 저는 精誠을 다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甚히 不適當한 일이 많은 것입니다. 讚頌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要素가 가장 重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音樂을 하고, 아무리 自己의 情熱을 다쏟고, 精誠을 다 모았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讚頌이 되지 못합니다. 讚頌은 하나님 앞에 上達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銘心해야 합니다.
마치 祈禱도 하나님이 들으시는 祈禱가 아니라면 그게 祈禱로서 意味가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可否間 對答을 해 주실 만한 祈禱가 되어야 眞正한 祈禱가 되는 것과 같이 讚頌도 하나님이 들어 주셔야만 바른 讚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어 주시는 讚頌은 하나님의 法대로, 하나님이 내신 法則에 依해서 上達이 되는 것이지, 사람이 自己 딴에 가장 좋다고 하는 方式으로 하나님 앞에 아무리 애를 써서 무엇을 올려놓는다고 할지라도 上達되지 않습니다.

讚頌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祭祀
하나님 앞에 上達되는 讚頌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暫時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하나님 앞에 上達되기 爲한 讚頌을 배우기 前에 옛날 이스라엘 百姓에게 내리신 祭祀 法을 注意해서 工夫해야 합니다. 元來 이 讚頌이 하나님 앞에 上達이 되고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신 다는 事實의 根據가 어디에 있느냐 할 때 그것은 이스라엘 百姓에게 命하신 祭祀의 여러 法則에서 찾을 수 있는데, 祭祀에는 讚頌도 包含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讚頌이라는 것은 그것 自體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祭祀입니다.
히브리서 13:15을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恒常 讚美의 祭祀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證據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하셨습니다. 恒常 讚美의 祭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 祭祀는 또 한편으로 볼 때 그 이름을 證據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의 聖號 또 예수님의 이름을 證據하는 입술의 열매입니다. 또 讚頌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祭祀라고 했습니다.
詩篇 69:30-31을 보면,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讚頌하며 感謝함으로 하나님을 廣大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舊約의 祭祀를 보면 罪에 關한 祭祀로 贖罪祭, 贖愆祭 그 다음에는 燔祭, 素祭, 和睦祭가 있습니다.
贖罪祭라 할 때는 罪를 贖하는 祭祀입니다. 贖愆祭라 할 때도 그것이 허물 건(愆)字인데, 그 사람의 허물을 贖하는 祭祀입니다. 燔祭라 할 때는 다 태워 올라간다는 뜻으로 燔祭라고 했습니다. 素祭와 燔祭가 가지고 있는 뜻에는 自己 自身을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이 重要합니다.
贖罪祭는 自己 罪를 承認하고 自己가 罪人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告하고 罪를 贖함 받는 精神을 表示합니다. 贖愆祭는 直接 社會生活을 하면서 自己의 行動이나 말로 남에게 累를 끼치고 하나님 앞에 罪를 犯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는 罪赦함을 받아야 하고 사람에게는 賠償을 해야 한다는 精神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燔祭는 自身이 하나님의 것인즉 하나님께서 穩全히 받으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全部 쓰셔야 한다 하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素祭는 흴 素字를 쓰는데, 그것은 自身의 生活 活動 卽 自己가 해 나가는 어떤 것을 하나님께 다 바쳐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福 주시사 보람된 땅 위의 生活을 하게끔 해 주시며 留意하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恩惠로 붙들어 주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特別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自己 自身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이 祭祀는 예수 그리스도의 贖罪 卽 우리를 贖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爲해서 當身을 全部 드려서 일하시되 當身의 生活 全體를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食物로 드림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和睦祭는 祭物을 드린 사람은 勿論 祭司長에게까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먹으라”고 하사 하나님 앞에서 그 飮食을 自己 食口와 함께 먹으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恩惠를 充滿히 받아서 더욱 힘을 얻고 나간다는 것을 表示합니다. 하나님의 잔치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셔서 하나님과 交通하고 하나님과 기쁨을 나눈다는 것을 表示하는 것입니다.
이런 祭祀 精神이 讚美 가운데 들어 있어야만 讚美가 穩全합니다. 讚美는 예수 그리스도의 恩惠의 터 위에서, 그의 贖罪하신 큰 터 위에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 上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讚美는 그리스도의 贖罪의 事實과 더불어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主님의 것이므로 主님께 全部를 드린다는 精神으로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全部를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 全體를 主張하셔서 當身이 願하시는 대로 하셔야 할 것을 分明히 마음 가운데 認識하고 懇切히 所願하는 사람만이 讚美의 祭祀를 드리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願하시는 대로 每日 生活하겠다는 것을 告白하는 意味로서 讚美가 上達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生活 全體를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하는 일입니다.
讚美를 드리면 主께서는 들으시고 기쁘게 받으신 거룩한 標로 나의 마음에도 그 기쁨을 주시고, 主님께 더욱 感謝하는 心情을 주시며, 主를 讚頌한사람답게 兄弟에게도 恒常 마음이 아름답고 따습고 平安함을 끼치는 거룩한 狀態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이 讚美는 입으로만 부르고 精神은 딴 데 있는 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 바른 讚頌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앞에 늘 바른 讚美의 祭祀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證據하는 나의 입술의 열매입니다. 直接 입으로 부르고 말로 나타내 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聖號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고, 하나님의 聖號를 들은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저가 하나님을 저렇게 높이는구나' 하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 이 讚美의 重要하고도 實際的인 效用입니다.
이런 讚美는 聖神님을 依支해야 할 수 있습니다. 藝術的 氣分이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精神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恒常 하나님 앞에 讚頌을 드릴 때는 聖神께서 나를 主張하시기를 懇切히 바라고, 愼重하게 마음을 기울여서 聖神님의 恩惠로 이 讚頌이 하나님 앞에 上達되기를 懇切히 바라면서 讚頌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精誠을 드려도 내 精誠으로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贖罪의 功勞의 터 위에서만 主께서 불쌍히 보시고 받아 주실 것을 믿고 讚頌해야 할 것입니다.

祈禱
거룩하신 아버지, 저희들이 主님 앞에 드리는 讚頌은 저희 스스로 드리는 것이 아니고 聖神님을 依支해서 聖神님께서 引導하심으로 아버님 앞에 上達되는 것을 믿고, 眞正으로 主께서 들으시는 讚頌을 드리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스스로 自己의 宗敎的인 熱情이나 藝術的인 感興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宗敎 歌曲을 하는 것으로 讚頌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시고, 아무 意識 없이 次例 지내 듯이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罪悚스러운 것인가를 바로 깨닫게 하시고 眞正으로 神으로 主께 讚頌을 올리고 讚頌을 드린 그 心情은 또한 主임의 그 거룩하신 寶座 앞에 엎드려 절할 수 있게 늘 이끄시고 저희를 깨우쳐 주시음소서.
主 예수님 이름으로 祈禱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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