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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8講 예수님의 弟子로 사는 生活(2)
전홍엽  2018-07-30 16:59:55, 조회 : 813, 추천 : 163

더운데 수고 하시지요?
읽으실 때 한글과 한자에 오자가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더운데 짜증 내지 마세요.

第8講
예수님의 弟子로 사는 生活(2)
눅 18:18-30
18○어떤 官員이 물어 가로되 善한 先生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永生을 얻으리이까 19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善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外에는 善한 이가 없느니라 20네가 誡命을 아나니 姦淫하지 말라, 殺人하지 말라, 盜賊질하지 말라, 거짓 證據하지 말라, 네 父母를 恭敬하라 하였느니라 21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2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不足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者들을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寶貨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23그 사람이 큰 富者인 故로 이 말씀을 듣고 甚히 근심하더라 24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財物이 있는 者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25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富者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26듣는 者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救援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가라사대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28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主를 좇았나이다 29이르시되 내가 眞實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爲하여 집이나 아내나 兄弟나 父母나 子女를 버린 者는 30今世에 있어 여러 倍를 받고 來世에 永生을 받지 못할 者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主님의 弟子 되는 세 가지 條件
우리가 예수를 믿고 主님을 따라간다면 그것은 主님의 弟子로서의 生活인데, 참으로 예수를 믿고 主님의 弟子로서의 生活을 바로 한다는 것은 主님의 弟子 되는 條件이 그에게 있어야 하고, 그리고 그 條件이 充當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난번에 이야기했습니다.
主의 弟子 되는 첫 번째 조건이 “무릇 내게 오는 者가 自己 父母와 妻子와 兄弟와 姉妹와 및 自己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하고”(눅 14:26)라고 했는데, 이것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하는 生活을 하지 않고,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者도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날마다 自己를 否認하고 제 十字架를 지고 主님을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셋째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自己의 모든 所有를 버리지 아니하면 能히 내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33). 世上에서 貴하다고 하는 것들을 그냥 쥐고서, 그것도 自己의 것을 삼고 예수님도 自己의 것으로 삼으려고 하는 廉恥 좋은 생각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聖經은 恒常 이 世上과 하나님을 兼해서 섬길 수 없는 것을 가르칩니다. “姦淫하는 女子들이여 世上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怨讐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世上과 벗이 되고자 하는 者는 스스로 하나님과 怨讐 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十字架를 진다는 것을 仔細히 說明하지는 않겠습니다. 十字架는 내가 日常 生活 가운데 받는 人生苦가 아닙니다. 이것은 十字架를 지는 事實이 苦生스럽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이 世上에서 世上 사람으로 살아갈 때 받는 一般的인 苦生을 意味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自己를 否認하고 스스로 지는 것으로 날마다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自己가 벗어버리려면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저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十字架를 지는 것이 아니고, 十字架를 지고서 繼續해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自己의 모든 所有를 버리지 아니하면 能히 내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 이 世上도 사랑하고 하나님 나라도 自己의 것으로 삼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 世上과 世上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두 마음을 품어서 定함이 없는 생각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世上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했습니다(요일 2:15).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그는 眞正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지 않은 사람인 까닭에 死亡에서 옮겨 生命으로 들어간 證據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에 품은 사람만이 死亡에서 生命으로 옮기운 者이고, 그것이 重生의 生命이 있고 없는 것을 生活에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居하려면 世上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 世上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며, 世上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할 뿐더러 하나님과 怨讐가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약 4:4).

自己의 모든 것을 버리는 精神
그러면 自己에게 있는 것을 버리는 精神은 무엇일까? 그 精神은 누가福音 21:1-4에 나오는 가난한 寡婦가 自己에게 있는 것 全部를 넣은 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어떤 가난한 寡婦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寡婦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豊富한 중에서 獻金을 넣었거니와 이 寡婦는 그 苟且한 중에서 自己의 있는 바 生活費 全部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마가福音 12:42-44에도 같은 內容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注意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寡婦가 넣은 두 렙타(렙돈)는 한 데나리온의 40分의 1밖에 안됩니다. 돈의 多寡로 보면 데나리온이 많지 렙돈이 많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寡婦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獻金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獻金의 많고 적은 것을 金額의 多寡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獻金은 金額에 무엇 하나가 더 加해진 것으로 가르치신 것입니다.
富者도 獻金을 하면서 돈만 넣은 것이 아니라 自己의 精誠도 넣고, 自己의 믿음도 넣은 것입니다. 精誠과 믿음과 마음의 所願과 또 하나님께 對한 敬虔한 心情을 다 넣어서 獻金을 한 것이지 富者라고 해서 반드시 돈만 넣고, 다른 것은 넣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富者도 많은 돈을 넣을 때는 그만큼 自己 마음이 거기에 붙어서 精誠을 기울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寡婦가 두 렙타 넣은 것을 더 많다고 하신 것을 보면 寡婦는 이 두 렙타에다 붙인 것이 더 많아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獻金의 참된 意味는 훨씬 더 많고 重하다는 뜻입니다.
이 寡婦가 거기 붙여서 넣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富者는 豊足한 중에서 넣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富者는 모든 것이 豊足하므로 獻金을 넣었다고 해서 自己 生活과 自己 生存에 打擊을 받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寡婦는 그 獻金을 넣을 때 自己의 生活費 全部를 넣은 까닭에 當場의 生活 對策이 漠漠해질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全部를 맡기고 依支하면서 하나님의 恩惠를 받아서 살아야 하는 處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且置하고라도 生活費 全體를 집어넣은 이 寡婦의 獻金 精神은 내 生活費, 내가 먹고사는 것을 깍아서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에 마땅히 드려야 할 것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自己 財産의 比例로 봐서 全部를 드렸으니까 많이 드렸다는 것은 아닙니다. 90%를 드렸으니까 많이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例를 들면 큰 富者가 自己 財産의 99%을 드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100億圓이나 버는 사람이 自己 財産의 99億圓을 드렸다 할지라도 나머지 1億圓을 가지고 一 年 동안은 잘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自己가 가지고 있는 全 財産의 比例로 따져서 獻金이 많다는 것도 아닙니다. 金額으로 보더라도 불과 몇 닢의 銅錢이므로 富者와 比較가 되는 金額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獻金에 붙어 다니는 것은 그런 物質的인 것이 아니고, 獻金을 獻金으로서 重要하게 만드는 것은 드리는 者가 自身의 生涯에 切實히 必要한 것을 犧牲할지라도 드려야만 하겠다는 마음의 要求와 그러한 事實을 認識한 信仰입니다.
이것은 自己 全體를 犧牲할지라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懇切한 犧牲 精神입니다. 自己를 犧牲하는 精神, 그것은 自己가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떠받치고 나가겠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마치 異敎徒들이 自己네 敎를 爲해서 殉敎하는 精神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自己를 犧牲하는 精神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가 이 땅 위에 서 나가는데, 나도 그 百姓의 한 사람으로서 그 임군을 섬기되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도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으로서, 그 중에서 어느 部分은 내 自身의 生命과 生活을 維持하는 데 쓰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그것조차도 바쳐야 할 것으로 確信했을 때 目前의 必要까지도 하나님의 일을 爲하여 바치는 것을 意味합니다.
여러분, 自身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받아서 산다는 걸 깨닫는 것이 언제나 必要한 것입니다. 내게 있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다. 獻金이란 내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은 없고 모두 하나님의 것으로서 그것을 내가 잘 配分해서 쓰는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生命, 財産 그리고 그 밖의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고 하나라도 내게 監督權이나 主張權이 있다고 생각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全部 잡아서 쓰시기를 바라고 드리는 强한 精神이 있을 때 그 獻金은 意味를 가지는 것입니다. 얼마의 돈을 가지고 ‘이건 敎會 用으로 쓴다. 나머지는 내 것인 까닭에 내 自身의 用으로 쓰겠다'고 할 때 그것이 獻金이 안 될 것은 없지만, 그것을 가장 價値있고 그 意味와 性格이 顯著한 獻金이라고 하나님께서 認定하시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이 寡婦의 돈 두 푼이 그렇게 重要하고 큰 意味를 가지는 것입니다. 寡婦의 두 푼이 그의 生活 全部를 支撑할 수 있는 能力인데, 그 能力까지도 ‘하나님께서 親히 맡으사 하나님 나라를 爲해서 直接 쓰시기를 바랍니다. 나머지 내 生活 問題는 하나님께서 親히 支撑해 주시고 引導해 주시면 그만입니다' 하고 어떻게 됐든지 相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精神이 “누구든지 自己 모든 所有를 버리지 아니하면 能히 내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는 말씀으로 表示된 것입니다. 이렇게 主를 따라가려면 確實히 自己의 所有를 다 버린다는 境界에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自己 運命이나 幸運 或은 自己 幸福을 維持할 수 있는 어떤 機關이나 能力이나 資金이나 事業이나 이런 것들이 主를 爲해서 積極的인 意味를 가지지 아니했을 때라도 心中에 自己 幸運을 抛棄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비록 하나님 나라의 일에 抵觸될 境遇라도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維持하면서 하나님께 福을 받겠다고 할 때, 이것은 寡婦가 두 렙타 넣은 精神과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敬虔 生活로 예수님의 弟子가 되지 못함
사람이 道德的 生活을 아름답게 敬虔하게 또 眞實하게 하여 남 보기에 欽慕할 만하다고 해서 예수님의 弟子 되기에 足하냐 하면, 그런 것은 到底히 예수님의 弟子 되기에 足한 條件이 못 된다는 것을 지난번에 말씀드렸습니다. 이 점에서 젊은 富者 官員의 이야기를 보겠는데 이것은 마태福音, 마가福音, 누가福音에 다 나옵니다. 누가福音 18:18부터 보면, “어떤 官員이 물어 가로되 善한 先生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永生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善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外에는 善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誡命을 아나니 姦淫하지 말라, 盜賊질하지 말라, 거짓 證據하지 말라, 네 父母를 恭敬하라 하였느니라.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가 오히려 한 가지 不足한 것이 있느니‥‥‥네가 그것을 다 지켰지만 참으로 永生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願한다면 그것을 지킨 것으로 足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生命의 世界에 들어와서 살려고 한다면 道德的인 敬虔만으로 되지 않고, 이 現實 世界에서 自己 生活로 나타내어야 하는 또 한 가지 重要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積極的으로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追求하는 生活 態度입니다. “네가 오히려 한가지 不足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寶貨가 네게 있으리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기를 願한다면 거기서 주시는 寶貨, 賞, 報酬를 받을 豫算을 해라. 그리하려면 寶物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或은 現實 世界의 物件과 物質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寶貨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렇게 해야 예수님을 좇아가는 弟子인데, 예수님을 좇으려면 財物이나 그 밖의 世上의 幸運의 열쇠나 手段이나 그런 것들이 그냥 붙어 다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큰 富者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甚히 근심하더라.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財産이 있는 者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富者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듣는 者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救援을 얻을 수 있나이까? 가라사대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財物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어서 좀처럼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生命 다음에는 財物이 貴하기 때문입니다. 그 財物도 生命도 抛棄한다는 精神이 確乎히 있어야 예수님을 따라가게 되는 것인데, 生命도 아깝고 財物도 아까우니까 다 쥐고 있으면서 예수는 自己 生命을 더 豊足하게 하려고 믿는 것이고, 또 自己 財物에 損傷이 안 가게 福을 얻으려고 쥐고 나간다면 참으로 가장 功利的인 宗敎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弟子가 되는 것은 그런 것과 相關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弟子가 되려면 自己 犧牲이 必要합니다. 自己에게 있다고 하는 것들과 自己 自身을 예수님의 十字架 앞에 내던져버린다는 確實한 精神이 生活 가운데 必要하다는 것을 여기서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런 生活 態度를 確實히 取하지 않고, 이 世上에서 高度的인 基督敎 文化의 生活을 그냥 繼續하겠다 하는 이런 精神도 道德的으로 봐서 나쁜 것은 아닙니다. 世上의 道德으로 봐서는 어떤 高度的인 高級한 宗敎에서 그 文化와 方式을 받아서 家庭이나 社會를 이루어서 남 보기에 다 尊敬하고 尊重할 만하게 살아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西歐의 發達한 文明과 文化의 한 形態로서 나쁠 것은 없지만 예수님의 弟子로서의 條件을 充當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나 그 精神 속에 基督敎를 그런 程度로나 생각하고 쓰는 것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弟子로서 그 뒤를 따라가는 所爲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救援받은 者다운 生活은 安易하게 이루어지지 않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다 하는 것이 떡 먹듯이 쉬운 것이 아닌 것을 우리가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救援을 받았다는 事實이 그렇게 容易하고, 安暇하게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救援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것입니다. 값없이 주신 事實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에게 그 事實이 있다는 證據가 자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 證據도 없이, ‘값없이 주시는 것이니까 누구든지 다 받았다. 누구든지 다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것은 누구든지 받을 수 있지만 받아야만 하는 것이지, 아무리 값없이 주시고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것이라도 안 받은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생각하거나, 값없이 누구에게든지 다 주시는 것이니까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값이 없다’고 安暇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값을 우리에게서는 안 받으시지 만 代身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받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無上의 價値를 가진 貴하고 貴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주셨다면 사람에게 分明히 가졌다는 表示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事實은 普通 돈을 數千萬 圓준 程度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萬一 누가 一億 圓의 돈을 아무 값없이 누구에게든지 준다면 모두 받기를 願할 것입니다. 그러나 一億圓을 참으로 값없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받아야만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지 않은 사람과 받은 사람은 큰 差異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지 아니하고 이런 것은 누구에게든지 값없이 주는 것이니까 값이 아주 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一億 圓을 받은 사람은 안 받은 사람보다 一億 圓이 있으니까 一億 圓의 힘을 發揮하기 始作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救援의 事實은 一億 圓 程度에 比較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顯著한 큰 能力과 顯著한 큰 恩惠가 그의 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값없이 주시고 누구에게든지 주신다고 해서, 내가 안 받았는데도 받은 것과 큰 差異가 없는 것같이 생각한다면 큰 妄想인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받았다면 그 證據가 어디 있느냐? 그것은 救援의 큰 事實이 내 生活 面面에 비치고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實證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치지도 나타나지도 않으면서 별다른 形態로 마치 그것이 있는 樣 꾸며대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참으로 救援을 받았으면 確實한 證據가 우리 生活에 나타나는 것인데 그 證據는 그렇게 안 된 사람이 만들어 내는 造作과 元來 다른 것입니다. 그런 證據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까닭에 그런 것이 없으면서도 人間的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여러 가지 證據들을 마치 큰 救援의 恩惠를 받은 結果인 줄로 誤解하는 일이 참 많습니다. 사람이 道德的이고 宗敎的이고 熱心 있고 또 宗敎 團體를 잘 꾸려 나가고 有力하게 活動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稱讚을 받으면, 그것을 훌륭한 信者라 하고 훌륭한 信者니까 救援을 받은 確實한 證據를 가졌다고 말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 世上에서 普通 쉽게 ‘예수 잘 믿는 사람이다’ 或은 ‘예수를 믿는데 有力한 사람이다’ 하는 말과 참으로 救援받은 恩惠가 充滿하다는 것이 반드시 같지는 아니한 것을 注意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를 믿는 큰 證據는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救援의 큰 恩惠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品性上의 能力도 있고 또 危機에 臨했을 때 發揮하는 神靈한 能力으로 證明되는 것입니다. 證據를 가진 사람이란 마치 비 오고 바람 불고 큰 洪水가 나서 밀릴 때에 꼼짝 않고 굳건히 서 있는 그런 집입니다. 그 집은 다른 사람이 들어갈지라도 튼튼해서 依支할 만하고 도무지 搖動하지 않는다는 큰 事實이 있는 곳입니다.
“主여, 主여” 하고 宗敎的인 熱情을 가지고 熱心으로 祈禱하고, 어떠한 方式으로든지 그것을 나타내고자 懇曲한 態度를 取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主여, 主여, 門을 열어 주소서!” 할 때 “내가 너희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 우리는 主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까? 恒常 즐겁게 禮拜堂에 모여서 主를 믿노라고 하는 그런 믿음과 그런 理由로 먹고 마시고, 또 主님은 우리 거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傳하셨고, 우리는 다 듣고 배우고 한 것이 아닙니까? 그랬는데 門을 안 열어 주십니까?” 하지만 그런 것이 所用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그렇게 安易하고 容易하게 救援의 證據를 人間的인 宗敎나, 人間的인 宗敎의 熱情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큰 탈입니다. 事實上 救援의 큰 恩惠가 그에게 있다면 “主여, 永生의 말씀이 主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까”(요 6:68) 하고 主님만 따라 가는 確實한 生活 態度를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弟子로서 사는 生活
主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弟子로서의 生活 態度인데, 主님의 弟子가 되려면 무슨 條件이 있어야 합니까? 主님을 따라가는 사람의 條件은 이미 말한 것이지만, 여기서 다시 强調하겠습니다. 첫째는 父母나 兄弟나 妻子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날마다 自己 十字架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自己의 모든 所有를 버린다는 것입니다(눅 14:26-27, 33).
다시 이 條件들을 보기로 하십시다. 첫째, 主님을 누구보다 다른 무엇보다 더 懇曲하게 사랑하는 까닭에 ‘主를 爲해서 내 모든 것을 바치겠다. 무엇이든지 必要한 것은 다 내놓겠다’ 하고 必要에 따라 얼마든지 自己 全部를 내놓는 精神이 처음부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主님을 따라가는 길에 確實히 서서 발걸음을 내디딜 때부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寡婦가 두 렙타를 넣는 精神이 거기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主님께 必要하고 기쁨이 되겠다고 생각할 때는 이러고저러고 躊躇할 것이 아닙니다. 꼭 하라고 말을 해서 겨우 始作하는 것이 아니라 自己 마음 가운데 즐겨서 ‘아, 해야겠구나’ 하면서 내놓는 것입니다. 이런 態度가 처음부터 必要합니다.
둘째, 十字架를 진다는 것은 主를 사랑하는 까닭에 主님의 일을 내가 즐겁게 짊어지고 가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爲하여 갈 것인가? 내가 누구를 보내야 할 것인가?”(사 6:8) 할 때 “저를 보내십시오. 이 짐은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 하는 것이 十字架를 지는 사람들의 精神입니다. 날마다 自己를 否認하여 自己가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卽 自己가 主를 잘 섬기고 主님 앞에 認定을 받아 賞을 받고 主님이 나를 重用하시게 하겠다는 이런 어쭙지않은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한다는 말입니다 날마다 自己를 否認하고, ‘나는 무엇인가? 나는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제 十字架를 지고 主님이 가는 方向을 向해서 가는 것입니다. 主님을 좇는 일은 언제든지 짐을 진다는 점이 重要한 것입니다. 假令 財物을 흩어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다 주는 일도 主님을 좇는 直接的인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主님을 좇으려는 積極的인 발걸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自己에게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준 다음에는 “나를 좇으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제 앞으로 나간다는 것을 意味합니다.
이와 같이 主님을 좇아 나간다 할 때 가장 積極的이고 決定的인 生活 態度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마음 가운데 自然스럽게 自己의 形便 如何를 不拘하고 始作해서 繼續 나아가는 것이 主의 弟子다운 證據이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사람의 證據입니다 그런 證據를 確實히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主님을 좇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좇아가 보려는 마음은 暫時 暫間, 어느 때 說敎를 듣던지 聖經의 그런 句節을 읽었을 때에 ‘나도 그랬으면’ 하는 程度의 慾望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번도 具體的으로 ‘어떻게 해야 主님을 따라갈 것인가? 따라가려면 나는 무엇을 신고 어떻게 나가야 할 것인가? 至今까지 나와 關係 있던 일을 어떻게 處理하고 나갈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도 해 본 일이 없다면, 主님을 좇아 나가려는 具體的인 生活 態度로 證據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安易하게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 있다. 예수를 믿고 파라다이스에 다 간다’ 하는 것은 너무나 廉恥없는 생각이 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信仰을 그렇게 容易하게 安暇하게 생각해서 適當히 宗敎的인 雰圍氣와 生活 態度를 取하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하는 이런 생각은 不當한 것입니다.
셋째로 사람은 財物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까닭에 마음이 財物에서 떠나지 않으면 主님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이 世上, 그것이 財物이든 權力이든 勢力이든 世上에 붙어 있는 能力이든, 어떤 좋은 것이든 自己에게 幸福을 주고 出世나 기쁨이나 好運을 가져다 주는 것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는 것인데, 마음이 거기에서 떠나지 않으면 主님을 참으로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自己 生命, 自己 生存, 自己 事業, 自己 所有라는 이런 問題가 重要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對해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서 自己의 全 精神과 마음을 기울일 데가 어딘지를 가르치신 것입니다. 十字架를 지지 않고, 날마다 自己를 否認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弟子가 못 된다 할 때는 事業도 自己 식으로 생각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十字架를 지는 生活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重要하다는 말입니다. 事業보다는 예수님이 지라고 하는 것, 自己의 짐을 自己가 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願하는 十字架라는 것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등에다가 十字架를 지고 또 自己의 것, 自己의 幸福을 爲한 事業도 짊어지고 가라는 것이 아니라, 自己가 지고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爲한 十字架인가, 每日每日 나보고 지고 오라고 하신 그 十字架인가 아닌가에 對한 確實한 判斷과 確信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確信이 없으면 十字架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간다는 아무런 內容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確信이 없이, 그런 것도 分別 못 하면서, 十字架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가 十字架를 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十字架를 안 지고도 主님의 弟子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도 어림없는 일입니다. 이 十字架에 對해서는 恒常 誤解하기 쉽습니다. 그런고로 十字架란 무엇인가를 알아야겠고, 그것을 細細히 모르더라도 左右間 지고 나아가는 生活 態度가 必要한 것입니다.
또 重要한 것은 自己 所有를 自己가 가지고 自己에게 붙여 놓고 앉아서는 예수님을 못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卽 自己의 事業이나 自己의 所有를 붙여 놓고서는 예수님을 못 따라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모든 것, 自己에게 가장 親密한 사람도, 自己에게 가장 좋다는 事業도, 自己가 가장 아끼는 所有라도 뒤로하고 나서 비로소 예수님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이 쉬운 말이 아닙니다. 어려운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要求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具體的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것을 생각지 않고 그건 으레 그렇게 하라는 것이겠고, 나는 나대로 내 事業 내 財産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쥐고서 예수를 믿고, 또 聖經은 자꾸 배우면 된다 하는 식으로 나간다면 큰 誤解입니다. 믿음의 길은 그렇게 걷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敎會는 主님의 弟子들로 形成됨
참 敎會는 主님의 弟子들이 形成하는 것입니다. 弟子 아닌 사람들도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具體的인 形態인 敎會를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敎會를 形成했다고 생각하면 내 自身이 누구의 弟子인가를 反問해 보고, 예수님의 弟子였을 境遇에는 그것이 옳겠지만, 그렇지 아니할 때는 큰 잘못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敎會가 참으로 自己 性格, 소금과 같은 짠맛을 가지려면 예수님의 弟子들로 形成된 敎會라야 하고, 弟子들이라면 弟子 되는 確實한 條件이 붙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事實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날 個人個人의 生活을 反省하고 참으로 예수님을 좇아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 敎會를 하나의 聖經工夫班과 같이 끝없이 聖經을 硏究하고 追求하는 團體로 여기거나 또는 同親契나 親睦 클럽과 같이 여겨서 같이 모여서 喜喜樂樂하고 交際하고 지내는 그런 程度로 敎會의 屬性을 생각했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聖經工夫班은 어디까지나 클라스(class)지 敎會는 아닙니다. 서로 모여서 交際하는 것은 한 個의 클럽도 될 수 있고, 어떤 社交 團體 或은 親睦 團體인 것입니다. 그것이 敎會의 確實한 性格을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世上에는 그런 團體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團體는 宗敎的인 것도 있고 非宗敎的인 것도 있지만, 敎會는 敎會대로의 確實한 性格이 있습니다. 그 性格을 다른 말로 하면 敎會를 構成할 때 먼저 예수님의 弟子들이 모여서 構成하는 것입니다. 弟子가 되려고 하면 自己 生命보다도 예수를 더 사랑한다는 生命에 對한 確實한 抛棄가 있고, 다음에는 自己 所有와 事業을 抛棄하고 그 代身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그 十字架 곧 예수님이 메라고 하신 그 멍에, 예수님이 抛棄하고 좇아오라는 그 길, 그리고 예수님이 오직 唯一한 親舊며 사랑의 對象이 되어서 그만 바라보고 그에 對한 心情을 바로 가져야 할 것이지 그 心情이 있다고 하면서 마음은 딴 곳으로 기울이고, 다른 것을 늘 計劃하고 다른 곳에다 마음을 다 쏟고서 그것을 쥐고, 이 幸福은 내가놓지 않겠다고 하면 예수님의 弟子 노릇을 못 합니다. 하나님과 財物을 兼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두 마음으로 定함이 없는 者에게 “두 마음을 품은 者들아, 마음을 聖潔케 하라”(약 4: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예수를 따라가는 弟子가 되려면 여러 가지 條件, 말하자면 基本的으로 이러한 精神, 이런 生活, 이런 基礎가 切實히 必要한 것입니다.

祈禱
거룩하신 아버지, 저희는 主님을 참으로 따라가노라 하지마는 主님의 弟子 된 아무런 資格이 없이 거저 따라가는 것이 아닌 것을 잘 깨닫게 하여 주시고, 主님만 懇切히 思慕하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저희의 事業이 아니라 主님께서 지라고 하시는 十字架를 지는 것이 重要하고, 저희 所有가 아니라 그건 다 뒤로 抛棄하고 오직 主님만 저희의 全部로 삼고 나아가는, 따라가는 이 生活을 하지 않고서는 主님의 弟子가 될 수 없나이다. 主님의 弟子가 되지 아니한 사람들이 모여서 아무리 奇異한 敎會를 이룬다고 할지라도 아무런 것도 形成하지 않는 것을 바로 精神 차려 알게 하시고 모든 것을 安易하게 생각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게 하시옵소서. 恒常 우리는 全部를 支佛해 버리는 말하자면 이 世上 사람의 생각대로 全體에 對한 犧牲을 確實히 自己가 決定하고서, 確實히 全體를 犧牲해 버리고, 그리고 主님을 따라 나가는 眞正한, 懇曲한 生活 態度가 있게 하시옵소서.
그것이 없이 至今까지 흥뚱항뚱하면서 容易하게 基督敎 文化의 터전 안에서, 基督敎 文化의 雰圍氣 안에서 文化를 形成해 나감으로써 훌륭한 基督敎가 形成된 것 같은, 이 世代的인 墮落의 症狀과 墮落의 精神 가운데서 건져 주시기를 비오며, 그렇지 아니하면 恒常 하나님의 참된 恩惠의 世界가 무엇인지를 到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確實히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主께서 至今까지 恩惠로 保護하시고 引導하심을 感謝하옵나이다.
主 예수님 이름으로 祈禱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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