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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7講 예수님의 弟子로 사는 生活(1)
전홍엽  2018-07-17 11:58:50, 조회 : 780, 추천 :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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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7講
예수님의 弟子로 사는 生活(1)
눅 14:25-35
25○許多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者가 自己 父母와 妻子와 兄弟와 姉妹와 및 自己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者도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 28너희 中에 누가 望臺를 세우고자 할진대 自己의 가진 것이 竣工하기까지에 足할는지 먼저 앉아 그 費用을 豫算하지 아니하겠느냐 29그렇게 아니하여 그 基礎만 쌓고 能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者가 다 비웃어 30가로되 이 사람이 役事를 始作하고 能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一萬으로서 저 二萬을 가지고 오는 者를 對敵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萬一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使臣을 보내어 和親을 請할지니라 33이와 같이 너희 中에 누구든지 自己의 모든 所有를 버리지 아니하면 能히 내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 34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萬一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者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누가福音 14 :25-35은 여러분께서 다 잘 아시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設定하신 예수님의 弟子 되는 條件이 세 가지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은 弟子가 되기 爲하여 絶對로 채우지 아니하면 아니 될 條件입니다.
弟子 되는 重要한 條件은 첫째, “무릇 내게 오는 者가 自己 父母와 妻子와 兄弟와 姉妹와 및 自己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하고”(26節). 弟子가 되려면 父母, 妻子, 兄弟, 姉妹, 自己 목숨보다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마 10:37), 둘째는 “누구든지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者도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27節). 自己 十字架를 每日 지고 自己를 否認하고 主를 좇아가야만(눅 9:23)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33節에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自己의 모든 所有를 버리지 아니하면 能히 내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 이것은 自己 財物에 對한 態度입니다. 財物에 對해서 그것을 自己의 것으로 생각하고 自己 自身의 幸福의 材料로 생각하고 있는 이 世上 사람들의 생각 그대로를 늘 維持하면서, 그것도 쥐고 예수님도 좇아가고자 하면 예수님을 좇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自己의 모든 所有를 버리지 아니하면 能히 내 弟子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弟子가 되기 爲해서는 이런 條件 하나하나를 가지고 自己를 檢討해야 할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弟子 되는 條件 세 가지
첫째 條件, “내게 오는 者가 自己 父母와 妻子와 兄弟와 姉妹와 自己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한다.” 이 말 自體는 그것을 다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떤 狀態의 愛情을 참사랑이라고 볼 때에 이에 미치지 못하는 愛情은 참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相對的인 表現입니다. 예수님께 對한 사랑에 比해서 他人에 對한 사랑은 예수님께 對한 사랑과 꼭 같지 않고 그 質에 있어서 떨어지는 것이므로 그런 점에서 예수님께 對한 사랑, 곧 “그 사랑”은 比較할 對象이 없으며 따라서 거기 비추어 볼 때 他人에 對한 사랑은 차라리 미움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태福音 10:37에는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者는 내게 合當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者도 내게 合當하지 아니하다”해서 더 사랑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치 아니하고 그리스도 以外와 自己의 가까운 사람들을 더 사랑하면 예수님의 弟子가 못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世上의 가까운 사람들과 사이에, 내가 누구에게 내 마음을 주고 마음을 기울이고 眞正으로 思慕하고 사랑하여야 되느냐? 弟子가 되기 爲해서는 누구를 따라가고 누구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누구와 第一 가까워야 하느냐 하는 것이 첫째 問題입니다.
둘째는 自己 十字架를 지고 예수님을 좇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弟子가 못 된다 하는 말인데, 그것은 누구와 더 가까워야 하느냐 하는 問題뿐만 아니라, 나는 무슨 일을 하고 또 일을 할 때에 어떠한 心情으로 그런 일을 해야 하는가? 주로 이 世上에서 自己가 人生의 길을 갈 때 어떠한 짐을 지고 가야 하는가를 表示한 것입니다
셋째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自己 모든 所有를 버리지 아니하면 能히 내 弟子가 되지 못한다.” 이것은 積極的으로 무슨 짐을 지는 것도 아니고, 또 누구와 더 가까이 지내라는 것도 아니고 現在 있는 狀態에서 무엇을 버려야 하는가를 가르친 것입니다.

救援의 길을 걸으나 救援과 相關없는 사람들
이 세 가지 條件을 말씀하시기 前에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묻기를 “主님, 救援을 얻는 者가 적습니까?”(눅 13:23) 할 때, 救援을 얻는 者가 많다든지 적다든지 하는 말을 直接 하시지 아니하고, “좁은 門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求하여도 못 하는 者가 많으리라”(마 7:13-14). 救援을 받고자 願하는 사람은 많지만 받고자 願하는 사람마다 다 救援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救援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란 그저 예수를 믿어 보고자 하는 사람을 指稱하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集會도 參席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아 보려고 하는 勞力은 어떤 意味로 確實히 救援을 받아 보고자 하는 마음의 要求에서 始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길 ‘예수를 믿었으니 나는 이미 救援을 받았다'고 하기가 쉽습니다만, 自己가 믿는 態度나 生活이 眞正으로 救援을 받기에 該當한 것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仔細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덮어놓고 基督敎에 入敎를 해서 어떤 敎會에 다니니까 自己는 이미 救援을 받았다고 容易하게, 安易하게 예수 믿는 道理를 생각하는 것은 참 危險한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고 어떠한 길을 가고 있지만,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畢竟은 死亡의 길이니라.”(잠 14:12; 16:25) 하시는 箴言 말씀과 같이 結局 救援과는 相關없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좁은 門으로 들어가기를 求해도 事實은 많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집 主人이 일어나 門을 한번 닫은 後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主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對答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主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主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쳤나이다' 하나”(눅 13:25-26) 只今 이 사람들은 過去의 經驗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過去에 우리는 主 앞에서 먹고 마셨고 또한 우리의 길거리에서 主께서 가르치신 것을 우리는 그저 듣고 배우고 했으니 主의 弟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行惡하는모든 者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눅 13:27). 이런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좁은 門에 와서 門 열어 주시기를 바라고 門을 두드립니다. 이때 “네가 누구냐?” 하고 물으면, “아, 主님 우리를 모르십니까? 우리는 主 앞에서 먹고 마셨고 또한 主님은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면서, 많은 사람이 相當히 깊은 關係를 過去에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自己 딴으로 表示를 하고, 그러한 經力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認定해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일에 對하여서 主님은,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者인지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行惡하는 모든 者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하십니다.

生命으로 引導하는 門은 좁고 險함
이렇게 해서 수많은 사람이 眞正으로 救援을 받기 願하지만, 참으로 救援을 얻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數많은 사람들이 主님과 이만한 程度의 關係를 다 가지고 좁은 門을 目標로 해서 自己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門에 이르러서 門 열어 주시기를 바라지만 열리지 않습니다. 最後에 門을 열어 주셔야만 救援의 거룩한 城 안으로 들어가서 救援의 길을 걸을 것인데 門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좁은 門 앞에 이른다해서 반드시 門을 열어 주신다 하는 保障이 없다는 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事實이 “主님, 救援을 얻는 者가 적습니까?” 하는 물음에 對한 對答입니다. 아무나 救援의 目標, 좁은 門을 向해 가서 좁은 門에 이르러 “門을 열어 주십시요” 한다고 열어 주시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를 믿는다고 스스로 認定하지만 眞正으로 救援을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數많은 사람들이 크고 넓은 길을 取해서 가는 것입니다. 元來 좁은 길은 많은 사람이 갈 수 없습니다. 許多한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는 人生의 길은 그만큼 넓은 길인 것을 意味합니다. 그 길로 들어가서 그들의 한 分子로 걷고 있다면, 그것이 結局 永生으로 引導하는 길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좁은 門으로 들어가라. 生命으로 引導하는 門은 좁고 險하다”(마 7:13-14)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좁은 길로 가지 아니하고 넓은 길을 向해서 간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넓은 길이란 반드시 不信者들만 걷고 있는 길이라기보다는 어떤 種類의 基督敎人들도 걷고 있는 길이요 通過하는 門입니다. 그 큰 門으로 들어가서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 곳을 걸어가면서 “이것도 基督敎요. 아, 우리는 救援을 받았다” 한들 그것은 生命으로 引導하는 길이 아니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게 山上寶訓에서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좁은 門으로 들어가라. 滅亡으로 引導하는 門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者가 많고 生命으로 引導하는 門은 좁고 길이 狹窄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3-14).
참으로 生命으로 引導하는 門을 찾는 사람 數는 적은데, 이것은 世界 人口에 比較해서 基督敎人이 대단히 적다 하는 意味가 아닙니다. 世界의 基督敎人의 數는 世界 全體 人口의 數에 比해서 決코 적은 數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世界 人口의 增加에 따라서 漸漸 늘어납니다. 이들이 世界 四方에 퍼져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生命으로 引導하는 門은 좁고 길이 狹窄해서 찾는 이가 적다고 그랬습니다. 結局 基督敎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좁은 門이 되었든지 넓은 門이 되었든지 그 中 어느 하나로 向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좁은 門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數가 적고, 또 길이 狹窄해서 찾는 이가 적고 그 門도 좁다는 것입니다. 좁은 門 앞에 이르러서 들어가기를 求하고 門으로 들어가고자 하지만, 다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門을 한번 일어나서 닫으신 後에는 다시 열어 주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事實로 보아서 이 좁은 門을 찾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 救援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 또한 그 門을 찾아와서 門을 두드리는 사람도 救援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좁은 門을 찾는 사람도 적은데, 그 적은 數에서도 얻으려고 해도 얻지 못하는 사람이 多數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를 믿어서 참으로 救援을 받는다 하는 事實은, 그 段階로 봐서 안 믿는 사람 數보다 믿는 사람 數가 훨씬 적지만,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좁은 門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의 數가 많다는 것입니다. 將次 넓은 門을 選擇해서 넓은 門으로 가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령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道理가 아주 넓어서 좁은 門이 아닌 것을 選擇하여 어려움이 와도 屈하지 않고, 아주 嚴格하고 嚴重히 모든 것을 다 細密하게 가려내서 간다고 할지라도, 或은 그것이 普通 世上 사람이 생각하기에는 참 여러 가지로 어렵고 괴롭고 가까이 갈 수가 없는 듯 한 苦難과 迫害와 여러 가지 애로를 헤쳐 가면서라도 살려고 하는 境遇일지라도 簡單히 救援받은 사람의 길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좁은 門을 向해서 들어가려고 하는 意思를 가지고 門 앞에 와서 그 生活을 해 보고자 애를 쓰는 사람이 많이 있을지라도, 眞正으로 좁은 門 안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가도록 許容 받은 사람의 數는 대단히 적은 것입니다. 이런 少數가 지금 걷고 있는 生活을 볼것 같으면 그것이 참으로 救援받은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生活입니다.

참된 敎會는 예수님의 弟子 되는 條件을 具備한 者들의 모임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는 者의 生活은 그리스도의 弟子의 生活인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引導하시는 데로 따라가는 사람의 生活이요, 반드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弟子 되는 條件을 具備한 사람의 生活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 容易한 일이 아닌 것을 알고 安易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려면, 그의 弟子가 되는 條件을 다 充當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聖經만을 끝없이 工夫한다고 해서 弟子 되는 條件을 充當하는 것은 아닙니다. 끝없이 敎會 와서 서로 和樂하게, 기쁘게 지내는 것 말하자면 무슨 좋은 클럽이나 좋은 契나 좋은 親睦 團體의 親和를 이룩하는 것으로 예수 믿는 道理가 充足됐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거룩한 敎會는 하나님의 말씀을 工夫하려는 聖經 工夫班이 아닙니다. 서로 和親하고 사랑하고 도와주고 나누고 하는 同甲契나 同親契와 같은 그런 性格과 目標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敎會는 世上에 對하여 소금과 같은 것이고, 빛과 같은 것입니다. 오히려 主님께서는 “너희는 世上의 빛이다 너희는 世上의 소금이다”(마 5:13-14). 그러므로 “빛을 비취도록 해라!” 或은 “소금이 맛을 잃으면 어찌 다시 짜게 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오늘 本文 34, 35節에도 소금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弟子 되는 條件을 하나씩 들어서 말씀하신 後에 바로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萬一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 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者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눅 14:34-35). 이것은 “소금이 맛을 잃으면 땅에도 所用없고 거름에도 쓸 데 없어서 내어버리는 수밖에 없다. 자, 注意해서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 만한 사람만 잘 알아들어라”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실 때, “들을 귀가 있는 者는 들을지어다”라는 말씀을 쓰셨는데 그것은 “알아들을 만한 사람은 잘 알아들어라, 못 알아듣는 사람은 밤낮 이야기해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어찌 다시 짜게 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弟子라고 自稱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自己는 그에게 屬했다고, 그에게 屬한 까닭에 거룩한 敎會라고 하지만 참말로 그리스도께서 要求하시는 敎會로서의 바른 屬性과 바른 性格, 소금의 맛과 같은 짠맛을 잃었다면 그것은 다시 어디에다 쓸데가 없는 것입니다. 契는 서로 돈을 돌려쓰는데 有用하고, 클럽은 나름대로 目的이 있어서 共同으로 무슨 慈善事業을 한다든지, 같이 和親하고 돕는 相互扶助의 일을 한다든지 하겠지만, 敎會가 敎會의 本質的인 맛을 잃어버리면 다른 것으로 目標를 바꾸어서 무엇을 한다고 하더라도 떳떳하지도 못하고 다른 것을 本來의 目的으로 삼았던 團體만큼 有能하지도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目標로 모이지 않았는데 딴 데로 돌아서는 까닭에 그 行步가 벌써 비꾸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제 맛을 제대로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弟子들’이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生活에서 弟子의 條件에 該當한 여러 가지를 實證하는 사람들이 거룩한 意識을 가지고 모여야만 敎會로서의 제 性格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敎會로서 이런 確實한 性格을 가지지 못하고 덮어놓고 “예수를 믿는다” 하면 宗敎 團體를 形成하고, 그 宗敎 團體의 正規的인 一員이 되어서 늘 왔다갔다하는 것이지 거룩한 敎會의 本質的인 맛, 소금의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소금과 같은 하얀 結晶體나, 그런 粉末이라고 해서 모두 소금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安逸하게, 適當하게 예수를 믿고 지낸다는 일이 얼마나 옳지 못하고, 危險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참된 市民이라고 하면 하나님 나라의 市民다운 特權과 特色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같은 高度的으로 神靈하고 聖潔한 社會의 性格을 個人의 人格에서 가지지 못한 채 恒常 그 精神은 暗昧해서 眞理보다 거짓을 더 빨리 믿고 귀를 기울이며, 그 道德的인 品性은 高貴한 하나님 나라의 品性을 把握하지 못하고 사람이 알기 쉬운 一般的인 人間의 情緖나 認定의 關係만을 얼른 좋아해서 거기에 얽매여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姿態를 似而非的인 것으로 歪曲하여 나타낸다면 그것은 대단히 옳지 못한 것입니다. 제 맛을 안 가진 소금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사랑하는 生活
그리스도의 弟子 되는 條件 特히 오늘 說明한 첫째 條件을 注意하여 記憶하십시다. 世上에 많은 사람이 있고 또한 그 중에 親한사람이 있을지라도, 내가 누구를 가장 사랑해야 하며 누구를 第一로 알고 가장 思慕하며 따라가야 할 것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만을 가장 사랑하고 따라나간다 하는 것을 그리스도를 더 사랑한다는 말로 表現했는데, 더 사랑한다는 말은 나를 나대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대로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同質의 사랑이라도 예수님께 더 마음을 쏟으라는 意味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兄弟를 사랑하는 사랑과는 別途로 空中에 떠돌아다니는 무엇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食口들을 사랑하고 自己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과 같은 사랑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心情이 非現實的인, 抽象的觀念이거나 어떤 思考에서만 빙빙 돌고 있다면, 그것은 진짜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면 그를 爲해서 自己의 情을 쏟을 때 추운 줄도 모르고 더운 줄도 모르고 배고픈 줄도 모릅니다. 或은 춥고 배고픔을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을 能히 克服하며 한없이 솟아나는 熱情을 가지고 그를 爲해 奉事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를 爲해서는 내 모든 것을 내던져도 좋다는 確固한 精神입니다. 自己 것을 自己 것으로 생각지 않고, 自己 것은 아무것이라도 主를 爲해서 犧牲해도 좋다는 이런 心情이 마음에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自己를 出世시키고 富饒롭게 만들고 幸福스럽게 만들고, 自己에게 여러 가지 利益을 가져다 줄 만한 것이 있을 때, 예수님을 向해서 좇아 나가야 할 그 瞬間에라도 停止하고서 自己 幸福을 增强하고 保存하고 保護하는 生活을 해야겠다 한다면 적어도 그것만큼은 重要하게 잘 돌아보아서 거기는 失敗나 損害가 없이 해 나가면서 예수는 예수대로 따라가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무 所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는 못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境遇를 恒常 注意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젊은 富者가 와서 여러 가지를 물을 때, 그에게 먼저 道德的인 問題를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對答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富者 靑年에게 “네게 오히려 한 가지 不足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者들에게 주고 너는 와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은 財物이 많으므로 근심하면서 갔습니다(마 19:16-22). 이 境遇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만 恒常 自己가 道德的으로 淨潔하고 至今까지 宗敎的으로 正統的인 規範과 規律을 잘 지켰으므로 能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고 或은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예수님은 어떻게 고쳐 주셨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財物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는 것이고 너는 그 곳에 네 마음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損傷시키지 않는 範圍 안에서 너는 가장 敬虔하고 가장 道德的이고 가장 奉事的인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십니다.
어떤 가난한 寡婦가 두 렙타의 돈을 드렸습니다. 두 렙타는 돈 두푼인데, 데나리온으로 比較해 한 렙돈은 한 데나리온의 80分의 1밖에 안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 당시 勞動者나 軍人들의 하루의 품삯, 로마 軍人의 하루 품삯으로서 左右間 누구든지 일해서 自己와 自己 食口가 하루 먹고살기 爲해 받는 賃金입니다. 그것으로 따질 때 하루 賃金의 80分의 一이 한 렙돈입니다. 寡婦는 그것을 두 푼 넣었다는 말입니다. 두 푼이니까 몇 푼이 안 되는 돈입니다. 그것은 寡婦가 延命할 全部입니다. 그것이 自己가 가지고 있는 財産에 比較해서 많다는 그런 意味는 아닙니다. 그가 얼마나 犧牲했는가를 말한 것입니다. 자기가 먹지 않더라도 우리 主님을 爲해서 내가 바치겠다. 自己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털어 바치더라도 좋다 하는 精神입니다. 그런 것이 마음에 가득차 있는 것이 예수님께 對한 懇切한 사랑입니다. 卽 그런 懇切한 사랑, 예수님께 對한 아주 明確하고 具體的인 사랑이 없이 그저 漠然하게 예수님을 依支하고 그가 주는 平安을 받고, 天堂으로 이끌면 가겠다 하는 아주 대단히 功利的이고 비위 좋은 이런 생각으로 安易하게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態度로는 主님의 弟子는 못 되는 것입니다. 數많은 사람이 좁은 門으로 들어가려고 할지라도 좁은 門으로 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적은 것이라고 가르친 말씀에서 생각해 볼 것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을 容易한 일로 安暇로 생각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十字架에 못박혔다면 어떠해야 하는지를 좀 仔細히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祈禱
사랑이신 主님, 저희를 極盡히 사랑하심을 感謝하옵나이다. 그 사랑으로 오늘날까지 저희를 붙드시고 保存하시고 引導하시나이다. 저희가 主를 믿고 主를 사랑하노라 하지마는 말과 혀 뿐이요, 眞正으로 行함과 眞實로써 主를 사랑하고 있는지 대단히 疑問스럽습니다. 저희에게 있는 여러 가지 것들, 저희에게 幸福을 줄 만한 것들을 꼭 부여잡고 도무지 놓으려 하지 않고, 그리고 그것이 내게서 달아나더라도 主님만 계시면 그만이다 하는, 主께 全部를 맡겨 버리고 主님을 全部로 삼는 心情이 없이 말로만 그렇게 하지 結局 自己에게 있는 것을 主께서 다 取해 버리시기까지는 頑固하게 自己 幸福을 自己가 지켜 가려고 하는 거짓된 생각과 頑固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죽어서는 天堂으로 가겠다 그러고, 살아서는 하나님을 믿는 모든 祝福을 받아 보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비위가 좋고 얼마나 廉恥가 없는 생각입니까? 主님은 當身의 弟子가 되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救援받는 사람이 많으니이까?' 하고 물었을 때, 救援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勿論 좁은 門을 向해가서 좁은 門에 이르는 사람도 많지만 참으로 거기 들어가는 사람은 적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主님, 主께서 門을 닫으신 後에 가서 두드린들 무슨 所用이 있습니까? 主님이 저희를 맞이하시고 들여보내시려고 하실 때, 精神을 차리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主를 따라갈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을 가지게 하옵소서. 浮虛한 가운데서 自己의 位置를 維持하고 自己의 生活을 維持하면서 主님을 따라간다는 생각, 自己의 感情이나 가지고 있는 人間的인 것을 하나도 抛棄하지 못했으면서 그래도 主님을 따라가겠노라고 하는 人間의 거짓된 생각을 다 悔改할 수 있도록 精神을 차리게 하시고, 主님만을 向한 懇切한 心情을 가지고 主를 따르게 하시옵소서.
主 예수님 이름으로 祈禱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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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8  第10講 그리스도에게서 眞理를 배운 사람의 生活 態度    전홍엽 2016/12/10 229 1342
697  第9講 빛 가운데서 行하고 眞理 가운데서 行하는者들    전홍엽 2016/11/10 262 1435
696  第8講 生命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 말씀대로 行함    전홍엽 2016/10/22 171 1111
695  第7講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면 거룩한 變化    전홍엽 2016/10/13 187 1023
694  第6講 聖徒의 사귐은 眞理 안에서 이루어짐    전홍엽 2016/10/06 186 1275
693  第5講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는 사귐    전홍엽 2016/09/17 171 1234
692  第4講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열매    전홍엽 2016/09/09 168 1167
691  第3講 聖徒의사귐은 하나님을 敬畏하고 서로 사랑함    전홍엽 2016/08/26 218 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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