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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6講 하나님과 交通하는 生活(2)
전홍엽  2018-07-03 20:51:38, 조회 : 785, 추천 : 193

  읽으실 때 한글과 한자에 오류가 있을 수 있으니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第6講
하나님과 交通하는 生活(2)
祈禱應答

눅 11:1-13
1○예수께서 한 곳에서 祈禱하시고 마치시매 弟子 中 하나가 여짜오되 主여 요한이 自己 弟子들에게 祈禱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祈禱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臨하옵시며 3우리에게 날마다 日用할 糧食을 주옵시고 4우리가 우리에게 罪 지은 모든 사람을 容恕하오니 우리 罪도 赦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試驗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5또 이르시되 너희 中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中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내 벗이 旅行 中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저가 안에서 對答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門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寢所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因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强請함을 因하여 일어나 그 所用대로 주리라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求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門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求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너희 中에 아비 된 者 누가 아들이 生鮮을 달라 하면 生鮮 代身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 하면 全蝎을 주겠느냐 13너희가 惡할지라도 좋은 것을 子息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天父께서 求하는 者에게 聖神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오늘도 新生者가 어떻게 祈禱하는가 하는 問題를 지난번에 이어서 생각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祈禱를 하면 우리의 祈禱가 잘된 것도 있고 잘못된 것도 있고 또 하나님의 뜻에 可合한 것도 있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祈禱하여 얻는 對答, 或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祈禱를 다루어 주시는 여러 가지 方法을 우리 信者들은 恒常 여러 모로 經驗을 하게 됩니다. 그런고로 그런 經驗을 할 때에 여러 가지의 方法을 잘 알아서 主께서 우리에게 願하시는 것을 바로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子女된 道理이므로 이제 이 祈禱를 다루시는 方法, 或은 對答해 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方法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祈禱 應答의 樣態
우리가 祈禱를 하면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對答해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곧 對答하신다. 或은 直接 卽席에서 對答하신다는 뜻으로 卽答이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主님 앞에 어떤 祈禱를 하면 그 자리에서 對答해 주시지 아니하시고 오랫동안 끌고 가시다가 나중에 豊盛한 內容을 더하여서 對答해 주시는 境遇가 往往 있습니다. 이렇게 祈禱의 應答을 그 卽時 해 주시지 아니하시고 더 遲滯하셨다가 應答하시는 점으로 보아 滯答이라 하는 말로 부를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떤 것 한 가지를 求하면 그 求한 것은 對答지 아니하시고 차라리 求하지 아니한 다른 것으로 우리에게 주사 받은 그것이 내가 求했던 것보다 훨씬 더 適合하고 좋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것으로 우리에게 對答해 주시는 것을 變答이라 말할 수 있겠고 그 다음에 이것도 變答의 한 種類가 되겠지마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祈禱할지라도 그 祈禱에 對하여서 直接 對答을 하시지도 아니하시고, 或은 오래 끌고 가시다가 應答하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것으로 주시는 것도 아닌 다만 어떤 事實을 알게 해 주시는 것으로 代身하시는 境遇도 있습니다. “내 恩惠가 네게 足하다. 이는 내 能力이 弱한 데서 穩全하여 짐이라”(고후 12:9) 하는 말씀으로 慰勞해 주시고, 當하는 그 언짢다고 생각하는 現實이 事實上 하나님의 恩惠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때가 있습니다. 이렇게 對答을 해 주시면 비로소 自己가 祈禱하여 求하려 했던 自己의 缺乏에 對해서 或은 自己 自身이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어떤 괴로운 問題에 對하여서 하나님은 그것을 쓰셔서 우리에게 크신 恩惠를 只今 베풀어주시려고 하실 뿐만 아니라 現在 그것으로 因하여 벌써 많은 恩惠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境遇가 있습니다. 그것에 對해서는 나중에 우리가 注意해서 생각하겠습니다만, 이것은 祈禱에 對한 對答으로 그러한 事實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지 그냥 내가 當한 모든 괴로운 일을 덮어놓고 모두 하나님의 恩惠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것은 아닙니다. 左右間 이렇게 “내 恩惠가 네게 足하도다. 이는 내 能力이 弱한 데서 穩全하여 짐이라” 하시는 이런 對答을 또한 應答이라고 합니다. 또 한 가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祈禱에 對해서 對答하시는 方法은 아무리 祈禱를 해도 아무런 對答이 없다는 것입니다. 對答이 없어서 或是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해도 對答이 오지 않는 境遇가 있습니다. 이것을 不答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일이 우리 生活 가운데 許多합니다. 그러나 왜 對答을 아니하시는가 하고 對答을 懇切히 苦待도 아니 하고 그저 次例 지내듯 한번 祈禱하고 지나쳐 버리는 境遇도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態度는 크게 注意해야 합니다. 以上 다섯 가지 祈禱에 대한 對答을 한 가지씩 생각해 나가겠습니다.

卽時 應答하여 주심
첫째로 卽答입니다. 卽答의 例를 聖經의 여러 군데서 볼 수가 있습니다만 特別히 舊約 聖經, 엘리야의 이야기를 한 例로 들겠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存在와 큰 能力을 分明히 이스라엘 百姓 앞에 證明하기 爲하여 이스라엘 百姓 앞에서 이스라엘의 임금에게 敢然히 挑戰을 했습니다.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床에서 먹는 바알의 先知者 四百五十 人과 아세라의 先知者 四百 人을 갈멜 山으로 모아 내게로 나오게 하소서”(왕상 18:19). 이 엘리야의 挑戰과 엘리야의 祈禱를 應答하신 事件이 列王記上 18:19-40에 記錄되어 있습니다.
結局 엘리야의 挑戰과 祈禱의 應答을 본 이스라엘 百姓들은 그만 엎드려 “여호와 그분이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왕상 18:39)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알 崇拜를 막고, 바알 先知者들을 하나도 逃亡 못 하게 다 잡아서 處置한 事件입니다. 이것이 卽答의 重要한 한 例인데, 이와 같은 卽答이 祈禱 한번으로 完全히 이루어진 事實을 볼지라도 恒常 注意할 것은 그 일에 對해서 祈禱 한번만 있었고 그 以前에는 아무 祈禱가 없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야가 이스라엘 임금 아합을 向하여 또 이스라엘 百姓에게 敢然히 이같이 挑戰하여, 바알이나 아세라의 先知者 數百 名을 갈멜 山으로 모아 오라고 해서 그러기로 作定했다는 事實은 여호와 하나님을 든든히 依支하고 行한 事實뿐 아니라 그 일에 對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榮光과 能力을 가장 잘 證明하는 것이며, 여호와께서는 어떻게 하라고 하시며 어떻게 對答을 하시려고 하시는가를 깊이 생각하면서 繼續 祈禱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聖徒로서 그런 때 祈禱를 하는 것이지 祈禱를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갈멜 山上에 가서 한번만 祈禱해서 그 자리에서 應諾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卽答이라는 것이 祈禱 한번에 모든 것이 應諾됐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危機에 맞닥뜨려서 決判을 내야 할 때의 祈禱를 意味하는 것이지, 그 이전에 準備하는 段階에서 懇切한 祈禱가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께 어떤 일에 對해서 直接 對答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現實的으로 꼭 이루어야 할 때까지 祈禱를 하는 것인데 그 일로 하나님의 榮光이 꼭 나타나게 懇切히 늘 期待하면서 하는 것이 正當한 일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祈禱를 應諾하셨다는 것은 그 祈禱가 그때 應諾되어야만 할 理由가 있어서 된 것입니다 엘리야의 境遇에 萬一 하나님께서 불로 對答지 아니하셨면 엘리야도 바알의 先知者와 같이 하나의 無能한 假想的인 神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여김을 받을 수밖에 없고, 또한 아무 援助가 없는 孤立 無援한 엘리야는 어찌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 종을 存在하게 하시고 그 종이 이 世上에서 하나님의 종인 것을 證明해야만 될 關頭에 섰을 때, 버리시거나 抛棄하시고 證明하지 않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종의 威信이나 信任度나 權威를 깎아내리려는 惡한 일을 魔鬼의 使嗾와 鬼神들의 使嗾를 받아서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事實을 絶對로 放置하시는 일도 없고 抛棄하시는 일도 없으십니다.
엘리야는 懇切히 여호와 앞에 祈禱하기를 “첫째로 主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신 것을 證明해 주시옵고, 그 다음에는 제가 主의 종이 되는 것도 證明해 주시옵고, 셋째로는 主의 종으로서 제가 主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行하는 것을 오늘날 證明해 주시옵소서”했습니다. 主의 말씀을 좇아서 이 일을 했다는 것은 엘리야가 그 동안 하나님과 交通하면서 이 일을 이렇게 挑戰해서 이렇게 이루어야겠다고 計劃해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權威와 能力을 證明하셔야만 할 重要한 時期에 버리시는 일이 없이 證明해 주신 것입니다. 또 事實上 이스라엘 百姓이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떻게 믿어야 할 분인가를 깨닫게 하려고 “참 神은 여호와 하나님뿐이라는 것을 먼저 이 愚昧한 百姓에게 實證으로 알려주셔야만 하겠습니다” 하고 祈禱를 할 때에도 主님께 求하여 啓示를 받아 主님의 뜻에 合當한 대로 方法을 取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主님, 主의 方法대로 여기까지 와 있사옵고, 이제 이 일에 決判을 내야 할 關頭에 서 있사오니 左右間에 나타나야 할 時間에 나타나 주옵소서”라고 祈禱할 때 “아이, 모르겠다”고 하실 主님이 아닙니다.
卽答은 그 일이 먼저 主와 더불어 經營되어야 하고, 主님의 指示와 引導를 받아서 主님의 크신 能力과 榮光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것같이 꼭 나타나야 할 時間까지 끌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主님의 거룩하신 뜻대로 主님의 啓示대로 主님의 方法으로 와서 마침내 그 일이 이루어져야 할 時點에서 求할 때 證明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卽答의 重要한 道理입니다. 이 道理에 依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能力이 證明되고, 自己를 하나님이 쓰심으로 그 能力을 드러내는 데 使用된 道具인 것이 實證되기 爲해서는 어떠한 判決을 해야 할 危機, 分岐點에 서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 指示하심으로 그 方法대로 引導하시는 것을 注意해서 잘 받아 가지고 行해야 할 것입니다.

遲滯하신 後에 應答하심
다음에 생각할 것은 滯答입니다. 어떤 일을 하나님 앞에 求했지만 主께서는 오래 끌고 가시다가 마침내 일이 다 글러진 것 같았을 때, 더 큰 하나님의 能力과 榮光이 나타나 먼저 祈禱로 求한 것보다 더 重要한 對答을 주시는 境遇를 말합니다. 이런 境遇에 우리가 注意해야 할 것은 오래 끌고 가시는 그 期間의 狀態는 全然 對答이 없는 不答의 狀態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事實입니다.
不答은 하나님께서 祈禱者의 祈禱에 아무 相關도 하시지 않지만, 滯答은 하나님께서 應答해 주시는 때까지 그 期間에 이미 어떤 일을 行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求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네 求하는 것을 네가 잘 알지 못한다. 네가 只今 그것을 求하지만 그것을 받아서 어떻게 바로 勘當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하십니다. 求하는 內容과 그 自身이 그것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뜻에 適應하게 내려주시려고 오래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只今 求하는 것이 現實上 必要하지만 다만 그것을 받을 만한 마음의 準備가 없는 形便을 보시고, 그를 이끄사 求하는 것을 充分히 받을 만한 位置에 올리시는 일을 먼저 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事實을 滯答이라고 하지만 祈禱하는 內容이 이루어진다는 점이 滯答, 或은 遲滯했다가 나중에 이루어 주신다는 그런 意味일 뿐이지, 事實은 祈禱에 대한 對答이 벌써 始作된 것입니다. 그 始作한 事實이란 마음의 準備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에서 對答지 아니하시고 遲滯하신다는 事實에서, 그 恩惠를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求한 것에 대한 아무런 意識이 없이 기다리지도 않고 或은 기다려보다가 지치면 斷念하고 말고 그리고 기다려도 오지 아니하는 事實을 注意해서 살펴보지도 않고 지내지 않는 것입니다.
往往 祈禱하고 祈禱에 대해서 事實上 받으려고 懇切히 期待하지도 않는 일이 많은데, 祈禱를 次例 지내듯이 하는 習慣 때문에 아주 免疫性이 생겨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때 자칫하면 祈禱에 대한 責任도 잊어버리고, 祈禱한 內容조차도 잊어버리는 弊端이 생깁니다. 이 滯答은 그런 것이 아니고, 懇切한 마음으로 그 祈禱 自體를 늘 注意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비로소 이와 같은 對答이 오는 것입니다. 늘 注意해서 생각하는 점은 하나님께서 對答을 해주시지 아니하시면, 그 일을 골똘하게 생각하고 그런 理由에 對해 聖經이 가르친 것을 詳考하고 反省을 하며 自己 마음자리가 果然 應答을 받을 만한가, 차츰차츰 그 곳을 向하여 기울이며 또한 自己의 狀態가 祈禱한 內容을 能히 勘當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가르쳐 주시고, 그의 마음을 聖神님으로 感化하시고 이끄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벌써 祈禱에 대한 重要한 對答입니다.
그런고로 事實 滯答이라고 했지만 그의 祈禱를 效果 있게 하신다는 점, 다시 말해서 나의 求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만이 全部가 아니고, 나와 하나님 사이에 거룩한 사랑의 交通이 있다는 점에서 效果가 있고 좋은 祈禱인 것입니다. 이렇게 祈禱 應答을 遲滯하심으로 보여주신 그 事實은 前에 내가 祈禱해서 얻은 事實보다 훨씬 값이 있고 意味가 있어서 果然 하나님의 크신 뜻과 恩惠를 깨달을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게 키 우셨다는 事實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必要로 한다는 事實은 그것이 우리 生活의 樣式이 되어서 하나님의 子女답게, 하나님 나라의 百姓답게 長成해 나가는 것이 重要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滯答에는 長成의 趣旨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祈禱에서 우리가 얻는 것은 長成에 必要한 糧食이 되는 것들입니다. 卽答을 받지 못한 까닭에 오히려 自己를 反省하므로 ‘아, 내가 여러 가지 점에서 어리석었구나. 不足하구나. 무엇인가 缺乏이 있구나’ 하고 前에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자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自己 能力이 아닙니다. 그것도 벌써 그 祈禱를 應答하시사 하나님께서 聖神님으로 깨닫게 하시므로 깨달아 나아가는 것입니다. 遲滯해서 對答을 얻는 이런 形式은 말하자면 그 祈禱한 內容에 對한 對答이 遲滯된다는 이야기뿐이지, 祈禱 그 自體가 效果있게 하나님 앞에서 다루어진다는 事實로는 벌써 始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對答을 아니 하셨다는 事實, 그것이 나에게 意味를 가진다면 그것은 그대로 하나의 重要한 對答일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親한 사람끼리 이야기를 하는데, 平素 같으면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對答을 하던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도 對答을 않고 쳐다만 본다든지, 或은 그저 잠잠히 있다면 물은 사람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지, 또 묻고 또 묻고 그러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아, 이 親舊가 平素에 그렇지 아니한 사람인데 어찌해서 對答을 안 할까?' 하면서, 묻는 말이 對答하기가 어려운 것인지 或은 對答 自體가 너무 어려워서 좀 생각하다가 對答하려고 하는 것인지, 내가 묻지 아니해야 할 것을 물었는지, 그렇지 아니하면 나에게 不便한 마음이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그의 顔色을 살펴볼 것입니다. 對答을 아니했다는 것도 하나의 反應의 形式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自己가 물은 內容과 自己가 물은 對象에 對한 關心이 깊었을 때 意味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往往 하나님께 祈禱하면서도 하나님께 祈禱하는 사람답게 懇切히 하나님의 顔色이 어떤지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對答이 오지 않을 때 왜 오지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덮어놓고 祈禱하고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그렇게 한番이나 두番 祈禱해서는 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고 抛棄해 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習慣的으로 그 말을 그대로 되뇌이는데 무슨 祝文이나 외우듯이 되뇌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祈禱를 疏忽히 생각하고 祈禱의 높은 警戒를 아무 效驗도 아무 靈感도 없는 境地로 끌어내리는 處事입니다.
우리는 祈禱가 恒常 하나님 앞에 應諾되어서 큰 恩惠를 받는 生活을 하기 願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可否間에 祈禱를 應諾해 주시며, 或是는 對答을 않으실지라도 나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시고 가르쳐 주셔서 그 祈禱를 했다는 事實의 效果를 자꾸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 祈禱를 하고도 對答에 對해서 아무런 反省도 없고 思念도 없고 그저 祈禱를 한번 했다는 滿足感 하나만 가지고 지낸다면, 異敎徒가 自己네 宗敎 行動으로 祈禱를 하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늘 注意할 것은 우리가 祈禱할 때는 全能하시고 神靈하신 하나님 앞에 祈禱를 한다는 事實을 잊어버려 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바꾸어서 내려주심
하나님께서 祈禱를 들어주시는 樣態의 또 하나는 變答입니다. 祈禱를 應答하여 주시되, 祈求한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은 마땅히 祈求할 바를 알지 못하고(롬 8:26), 하나님의 뜻을 여러 가지로 알아보고 살펴서 하나님의 뜻대로 求한다고(요일 5:14) 하나 모든 境遇에 하나님의 뜻을 仔細히 아는 것이 아니므로 비록 祈禱하는 動機가 主께 對한 사랑에 있을지라도 또는 懇求하는 內容이 主님의 榮光을 爲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內容이 不足하거나 不適當할 때에 主께서는 그것을 適當한 것으로 바꿔서 내려주시는 까닭에 그러합니다. 사람은 將來의 일을 알지 못하므로(전 7:14; 8:7; 10:14), 將來로 뻗어 나갈 現在의 일들을 祈禱할 때에, 그 祈求한 것들이 반드시 適切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祈禱者의 任務 遂行에 가장 適宜하며, 일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들로 바꿔서 내려주십니다. 祈禱者는 使命 遂行에 必要한 것들을 忠誠스럽게 求하지만 하나님께서는 智慧와 사랑으로 應答하시되 다른 것, 더 좋은 것으로 내려주십니다.

“내 恩惠가 네게 足하다”
이러한 應答 중에 特異한 應答은 “내 恩惠가 네게 足하도다. 이는 내 能力이 弱한 데서 穩全하여 짐이라”(고후 12:9)고 하시는 對答입니다. 이것은 바울 先生이 드린 祈禱에 對한 主님의 應答입니다. 이 應答의 前後 事情을 바울 先生은 고린도後書 12:7-10에 記錄하였습니다. “여러 啓示를 받은 것이 至極히 크므로 너무 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肉體에 가시 곧 사단의 使者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自高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爲하여 내가 세 番 主께 懇求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恩惠가 네게 足하도다. 이는 내 能力이 弱한 데서 穩全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弱한 것들에 對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能力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爲하여 弱한 것들과 凌辱과 窮乏과 逼迫과 困難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弱한 그때에 곧 强함이니라.”

應答하지 아니하심
또 祈禱할 때 늘 銘心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그 子女의 祈禱에 全然 應答하지 아니하시는 境遇입니다. “全然 無答”은 “오랜 後의 應答”의 境遇와 아주 다릅니다. 오랜 後, 果然 얼마 後의 應答의 境遇는 이미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사람이 祈禱한 것을 天父께서는 바로 곧 應答치 아니하시고 얼마동안 應答을 遲滯하시면서 그 동안 그 사람을 가르치시고 反省케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恩惠를 헛되이 받지 않도록 準備케 하십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이렇게 準備케 하심도 이미 天父님께서 그 사람의 祈禱에 對하여 어떠한 對答을 내리시기 始作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後 때가 익은즉 天父께서는 그 사람이 祈禱한 것에 對한 應答을 내리십니다.
그러나 “全然 無答”의 境遇는 하나님께서 祈禱를 全然 들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祈禱는 可憎히 여기시는 일도 있습니다(잠 28:9). 하나님께 무엇을 祈禱하여도 黙黙不答하셨을 때에 自己의 精誠이 不足해서 그러한가 하고 좀더 熱心으로 祈禱합니다. 그래도 아무 對答이 없으면 좀더 繼續합니다. 그래도 應答이 全然 없으면 熱情이 차차 식고 勞力하던 것도 줄어들다가 마침내 그 問題에 關한 祈禱는 더 以上 드리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祈禱할 때에 祈禱하는 內容을 하나님께서 親히 들어주시기를 懇切히 願하는 것보다 이 祈禱를 듣는 周圍 사람들에게 끼칠 影響을 좀더 重要히 생각하고 祈禱를 합니다. 옛날 바리새人들 中에 會堂과 距離 어귀에 서서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에 큰 소리로 祈禱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마 6:5). 이런 사람들은 大體로 祈禱의 現實的 效果를 노리는 사람입니다. 自己의 懇求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면 좋으나 그렇지 아니하여도 自己 祈禱가 敎育的, 啓蒙的 또는 그 社會에서 自己네 階級의 指導權을 다짐하는 政治的 效果를 發揮하도록 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祈禱는 全然 듣지 아니 하시는데, 거기에 무슨 까닭이 있는가를 聖經은 가르쳐 줍니다. 萬一 내 祈禱 中에 어떤 것을 하나님께서 全然 듣지 아니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警責하심이니, 곧 내 祈禱 뒤에 숨겨져 있는 나의 잘못과 罪惡을 깨닫고 이를 悔改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聖意를 意味하는 것입니다. 聖經이 가르치는 “全然 無答”의 境遇는 여러 가지이나 그 중에 몇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내가 내 마음에 罪惡을 품으면 主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둘째는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律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祈禱도 可憎하니라”(잠 28:9). 셋째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求하지 아니 함이요 求하여도 받지 못함은 情慾으로 쓰려고 잘못 求함이니라”(약 4:2-3). 넷째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智慧가 不足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厚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求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求하고 조금도 疑心하지 말라. 疑心하는 者는 마치 바람에 밀려 搖動하는 바닷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主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定함이 없는 者로다”(약 1:5-8).

祈禱
거룩하신 아버지, 오늘 아침에는 저희가 아버님이 주신 가장 큰 恩惠의 方途의 하나인 아버님과의 거룩한 交通의 方法인 祈禱에 對해서, 아버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交通을 해 주시는가, 어떻게 應諾을 해 주시는가에 對해서 暫時 생각을 하게 하셨음을 感謝하옵나이다. 저희가 이러한 거룩한 道理를 그저 듣고 재미있다 생각하는 程度로 끝내지 않고, 或은 듣고 有益하다고 하는 程度로 끝내지 아니하고,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고 生活 가운데에서 깊이 體驗해서 果然 主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큰 恩惠를 恒常 베푸시려고 하는가에 대해서 敏感하게 알게 하여 주옵소서.
至極히 높으신 하나님, 이리하여서 저희에게 주시는 恩惠의 方途가 아버님 앞에 貴히 使用되고, 效果 있게 使用되며 이 높은 靈感의 警戒를 아주 無意味하고 效驗없는 低俗한 境界로 끌어내리는 그릇된 習慣이나 그러한 生活 가운데 들어가지 않게 하시옵소서. 主님, 이 祈禱로 말미암아 許多히 많은 잘못된 習慣이 길러지는 것들을 다 하나씩 하나씩 고치고 바로잡아서, 主님 앞에 참으로 祈禱가 效果가 있을 뿐 아니라, 아버님과의 交通이 거기서 確然히 늘 成立되어 아버님의 크신 恩惠를 받고 사랑을 받고 사랑의 交通을 늘 繼續하는 生活을 하게 하옵소서. 저희를 保護하시고 惡한 모든 것들을 물리치시며 主의 거룩한 종들을 세우시고 主님의 榮光을 나타내시며, 不義하고 惡한 者들이 恒常 하나님의 나라를 侵害하고 하나님 나라에 여러 가지 올무를 놓고 搖動을 하고 妖邪스럽게 行動하는 것을 主께서 다 물리치시고, 오직 聖神님의 充滿한 役事가 저희와 같이하셔서 神靈하고 거룩한 나라의 能力을 저희가 더 맛보면서 아름답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主 예수님 이름으로 祈禱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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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708  第10講 하나님의 뜻을 所願하는 生活    전홍엽 2018/08/18 174 828
707  第9講 讚頌드리는 生活    전홍엽 2018/08/09 185 841
706  第8講 예수님의 弟子로 사는 生活(2)    전홍엽 2018/07/30 188 904
705  第7講 예수님의 弟子로 사는 生活(1)    전홍엽 2018/07/17 211 876
 第6講 하나님과 交通하는 生活(2)    전홍엽 2018/07/03 193 785
703  第5講 하나님과 交通하는 生活(1)    전홍엽 2018/06/28 193 988
702  第4講 生命의 聖神의 法이 主張하는 生活    전홍엽 2018/06/14 180 898
701  第3講 眞理를 分別하고 깨닫는 生活    전홍엽 2018/05/30 167 923
700  第2講 重生을 體驗하는 生活    전홍엽 2018/05/24 186 903
699  第1講 重生前의 生態    전홍엽 2017/06/07 202 1246
698  第10講 그리스도에게서 眞理를 배운 사람의 生活 態度    전홍엽 2016/12/10 250 1437
697  第9講 빛 가운데서 行하고 眞理 가운데서 行하는者들    전홍엽 2016/11/10 282 1524
696  第8講 生命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 말씀대로 行함    전홍엽 2016/10/22 191 1151
695  第7講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면 거룩한 變化    전홍엽 2016/10/13 205 1065
694  第6講 聖徒의 사귐은 眞理 안에서 이루어짐    전홍엽 2016/10/06 203 1315
693  第5講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는 사귐    전홍엽 2016/09/17 190 1282
692  第4講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열매    전홍엽 2016/09/09 186 1208
691  第3講 聖徒의사귐은 하나님을 敬畏하고 서로 사랑함    전홍엽 2016/08/26 237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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