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REE TALKING ::

 


 로그인  회원가입

第5講 하나님과 交通하는 生活(1)
전홍엽  2018-06-28 22:16:59, 조회 : 786, 추천 : 148
- Download #1 : 75abc.jpg (2.68 MB), Download : 9


第5講
하나님과 交通하는 生活(1)
祈禱란 무엇인가?

눅 18:1-14
1○恒常 祈禱하고 落望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譬喩로 하여2가라사대 어떤 都市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無視하는 한 裁判官이 있는데3그 都市에 한 寡婦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怨讐에 對한 나의 怨恨을 풀어 주소서 하되4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後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無視하나5이 寡婦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怨恨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6主께서 또 가라사대 不義한 裁判官의 말한 것을 들으라7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擇하신 者들의 怨恨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8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速히 그 怨恨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人子가 올 때에 世上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9○또 自己를 義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蔑視하는 者들에게 이 譬喩로 말씀하시되10두 사람이 祈禱하러 聖殿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人이요 하나는 稅吏라11바리새人은 서서 따로 祈禱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討索, 不義, 姦淫을 하는 者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稅吏와도 같지 아니함을 感謝하나이다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禁食하고 또 所得의 十一條를 드리나이다 하고13稅吏는 멀리 서서 敢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罪人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義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自己를 높이는 者는 낮아지고 自己를 낮추는 者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누가福音 18:1-14에 있는 말씀 가운데 特別히 ‘祈禱'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恩惠의 手段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功勞로 罪赦함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生命을 받아서 永生을 얻은 사람, 새로 創造함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子息인 까닭에 하나님과 거룩한 交通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거룩한 交通을 하는 重要한 方式의 하나가 祈禱를 하는 것입니다. 祈禱는 사람이 自己 信仰의 對象을 向하여 自己 마음의 所願을 이야기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서로 交通하는 重要한 方式입니다. 그러므로 祈禱하는 中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必要한 여러 能力과 내가 하나님의 子息답게 살아가는 데 있어야 할 것들을 恩惠들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祈禱는 恩惠의 手段으로 重要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救援하신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肢體로 삼으사 그 거룩한 姿態를 땅 위에 敎會라는 形態로 세워 놓으셨는데, 그리스도의 거룩한 몸에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여러 가지 恩惠 中에 가장 重要한 方法은 하나님의 말씀인 聖經입니다. 그러므로 聖經, 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기를 願하시사 주신 啓示의 말씀이 恩惠의 方法으로 가장 重要한 것이지만 그와 더불어 우리에게 참으로 좋은 方法으로 주신 것이 祈禱입니다.
祈禱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그저 마음에 있는 所願을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으로 完全히 成立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내가 서로 交通하는 것, 쉬운 말로 하면 주고받고 하는 점이 더 重要합니다. 그런故로 내가 祈禱를 해서 하나님과 거룩한 交通이 있으면 벌써 祈禱는 效果가 있고 本意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一方的으로 求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 주셨다는 것만으로 ‘우리의 祈禱는 이렇게 되어야 成功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祈禱에 對해서 바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祈禱한 內容이 꼭 成就되어야만 참으로 좋은 祈禱라든지, 成功한 祈禱라고 할 수 없습니다. 祈禱는 하나님과 주고받는 거룩한 交通인 까닭에, 내가 하나님께 이야기했을 때 하나님이 “오냐, 그러냐” 하고 들어주시는 境遇가 있는데 이것도 물론 좋은 祈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무엇을 주시라고 懇切히 請했을 때 “아니, 그것은 가지면 안 돼. 다음에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줄테니 只今은 잠자코 있어라” 하실지라도 失敗한 祈禱는 아닙니다. 하나님이 “오냐” “아니다” “응, 그러냐” 하시면서 어떤 식으로든 對答을 하시면 그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에 交通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熱心히 祈禱하였다 해도 하나님과 交通이 없는 祈禱는 祈禱로서 成立하지 않습니다. 여러 時間을 熱心으로 하나님께 무슨 말을 하고, 그 말을 여러 번 反復하고, 또 求하는 바를 꼭 주시라고 조르는 식으로 말씀을 드리면서 ‘變함 없이 같은 模樣으로’ 長期間의 歲月 동안 祈禱하는 것은 바른 祈禱가 아닙니다. 祈禱하는 사람만 一方的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아뢰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 對하여서 아무런 對答도 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交通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功勞로 맺어진 거룩한 關係에서 求함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祈禱에서 重要한 것은 祈禱한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거룩한 交通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交通할 때에는 兩者間에 있는 어떤 一定한 關係의 터 위에서 하게 됩니다. 남남끼리, 親舊끼리, 主人과 雇傭人, 어버이와 子女들이라는 關係의 터 위에서 그에 相當한 交通을 하게 됩니다. 그 中에서 어버이와 子女의 關係는 사랑과 義理로 連結되어 있습니다. 이 터 위에서 父母와 子息은 서로 交通을 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求할 때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어떤 一定한 關係위에 서서 하게 됩니다.
平素에 별로 하나님의 權威를 認定하지 않던 사람이 非常한 危機가 닥치자 急하게 하나님께 무엇을 求해 보기도 하는데, 그는 하나님과의 正當한 關係를 考慮하지 않고 오직 自己의 急迫한 必要만 求해 본 것입니다. 이런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求하는 正當한 態度가 아니며, 따라서 正當한 交通을 期待할 수 없는 것입니다. 信者가 하나님 앞에 祈禱할 때는 이런 關係가 아닙니다. 被造物이 創造主에게 求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子女가 子息으로서 求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버이와 子息間에 있는 사랑과 義의 關係로 象徵되는 거룩한 關係의 터 위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거룩한 關係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功勞로 맺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祈禱하는 者는 天父께 예수님의 功勞를 依支하여 그의 이름으로 祈禱를 드립니다. 이런 祈禱는 걸인이 사람에게 도움을 求乞하듯이 自己의 缺乏만을 채우고자 相對를 크게 考慮할 것이 없이 하는 求乞이 아니라, 子息이 父母에게 사랑의 關係에 依해서 아뢰는 것입니다. 天父께서 바른 마음으로 祈禱하는 子女의 祈禱를 對答해 주실 때, 天父와 子女間에 거룩한 交通이 이루어집니다.
祈禱는 宏壯히 어려운 말을 滔滔하게 늘어놓아야만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답게 어머니 아버지에게 自己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면 되는 것입니다. 말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가 배가 고파서 어머니의 젖을 찾을 때에는 “어머니, 젖 주세요” 하고 말을 똑똑히 하는 것이 아니라, 배고프다고 우는 소리밖에 없을 것입니다. “빽!”하고 울면 어머니는 참으로 敏感하게 그 뜻을 알아듣고 “아, 저놈이 배가 고파서 우는구나”하고 그 소리로 區別을 한 다음에 데리고 와서 “아이고, 배가고팠니?”하면서 마치 아기가 어른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것같이 어머니는 자꾸 어른 말로 중얼거려 가면서 어린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배가 고팠니?” 하는 말을 알아들을 까닭이 없으나 주는 젖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 까닭에 젖꼭지를 입에다 물고서는 熱心히 빨면서 제 배고픈 것을 차츰차츰 채워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子女로 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은 처음에 自然스럽게 하나님께 糧食을, 젖을 求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 좋은 일입니다. 聖經에도 “詭譎이 없고 純全한 道의 젖을 思慕하라”(벧전 2:2)는 말씀이 있습니다. 詭詐스러운 것이 없고 純粹하다는 말입니다.

長成의 程度에 따라 正直하게 求해야 함
그런故로 하나님의 子女로 난사람이 처음에 懇切히 思慕하는 젖은 怪狀한 人間 宗敎의 主張이나 그릇된 理論이 뒤섞인 不純한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本뜻을 바르게 나타내는 道理입니다. 그리고 純全한 道의 젖은 救援의 道理를 잘 알게 할 수 있는 많은 實證들을 包含하고 있습니다
純全한 젖을 먹으면 그 젖에 不純한 것이 없는 故로 信者에게 豊盛한 營養이 들어가서 信者는 튼튼해지는 것이고, 그리하여 더욱 純潔하고 神靈한 生活을 하게 됩니다. “갓난아이들같이 純全하고 神靈한 젖을 思慕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救援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2). 詭譎이 없고 純全한 젖을 思慕하는 心情은 자라난 程度에 따라서 自然히 아버지에게 그러한 젖을 주시기를 빌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그가 아주 어리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무엇을 要求하는지를 잘 아십니다. 갓난아이가 젖을 要求할 때에 어른처럼 말을 못 하고 울기만 하더라도 어머니는 아이의 要求를 敏感하게 아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細細한 事情을 얼마나 잘 아시겠습니까? “求하기 前에 너희의 쓸 것을 이미 아셨느니라”(마 6:8). 求하기 前에 벌써 쓸 것을 아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純全한 道의 젖을 주시기를 빌 때에는 어려운 말과 形式을 따르려고 하지말고 懇曲한 心情을 나의 長成의 程度에 맞게 正直하게 하나님께 求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다 아시고 必要에 따라서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祈禱의 內容이 充實하고 表現이 다 具備되어 있다는 것 때문에 應答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中心을 보시고 對答을 해 주십니다.
때때로 祈禱를 하고 나서 自己가 求하고자 하는 것들을 充分히 다 告하지 못했다고 느끼는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그것이 第一 重要한 問題가 아닙니다. 우리의 祈禱는 하나님께 내 事情을 알려 드리는 데 本意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求하기 前에 우리 各各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십니다(마 6:8). 우리가 自己 事情을 아는 것보다도 더 仔細히 우리의 事情을 아십니다. 그러하신 하나님께 우리가 自己의 必要를 告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심을 念頭에 두고 나의 事情을 呼訴하는 것이 옳습니다(롬 8:26-27).
여기서 우리가 알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必要로 할 때 必要한 것들을 適時에 내려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하나님이신 것을 맛보아서, 卽 經驗해서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옛날의 詩人과 같이 “아, 여호와께서는 내가 羊일 때 나의 牧者가 되신다. 그래서 여호와가 나의 牧者로 계시는 동안은 내게 不足한 것이 없다”(시 23:1)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奢侈스럽고 넉넉하다” 그런 말이 아니라, “있어야 할 것은 다 있다”는 말입니다

祈禱하는 者가 가져야 하는 바른 마음자리
어떤 富饒하고 和樂한 家庭에서 家長인 아버지와 어린 아들 사이의 對話 한 토막을 들으니 아들이 아버지에게 정답고 恭遜한 態度로 自己에게 있어야 할 것들을 채워 주시기를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오냐, 그것들이 네게 있어야 할 것을 내가 안다. 그것을 모두 네게 주마” 하였습니다. 이 父子의 對話는 世上 사람들에게 조금도 異常하지 않고 아주 當然하게 들립니다. 좋은 아버지, 좋은 아들 사이의 이런 交通은 사랑과 義의 關係로 보아 아주 當然한 것입니다. 萬若 그 아들이 집을 떠나 乞人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乞人에게 먹는 빵 한 조각을 求乞해서 먹는다면, 그것을 아버지가 알았을 때에 아버지의 哀痛과 忿怒가 어떠하겠습니까? “네가 무슨 까닭으로 이런 짓을 하느냐? 내가 네게 주는 사랑에 무엇이 不足하였기에 辱된 짓을 하느냐?” 하고 嚴히 꾸짖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무엇을 빌고 求할 때에도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子女가 서 있어야 할 바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하나님의 힘을 빌어서라도 내가 가지기만 하면 된다”는 이러한 動機, 속셈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비는 것은 決斷코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怨讐 되는 자리(약 4:4) 卽 世上과 벗이 되려는 제 所願을 이루고자 하나님께 비는 것은 하나님의 子女가 할 짓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迎接하는 者 곧 그 이름을 믿는 者들에게는 하나님의 子女가 되는 權勢를 주셨으니”(요 1:12), “聖神이 親히 우리 靈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子女인 것을 證據하시느니라”(롬 8:16).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르쳐 주심에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子女임을 確信하는 것이요, 그 事實을 確信할진대 우리는 平素에 하나님의 子女의 權勢에서 나오는 높은 地位와 여러 가지 特權을 正當히 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 世上에 살고 있는 하나님의 子女의 말과 行動과 態度는 世上 사람 앞에서 天父께 榮光을 돌리지 않으면 辱을 돌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가서 이 世上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子女다운 道德과 거룩한 威信을 恒常 維持하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하나님의 子女답게 天父께 나아가 祈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사랑과 義의 關係에서 아들이 아버지께 求하고 아버지는 應答하는 앞의 例에서 또 한 가지 事實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必要한 것들을 주시기를 빌 때에 그는 自己에 對한 아버지의 사랑과 義와 能力을 信賴하고 祈求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平素에 天父께서 우리 各自에게 쏟으시는 큰사랑을 느끼고 있으며 또 그의 義로우심과 公平하심과 無限하신 能力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人間들에게 햇빛과 雨露之澤과 살기 爲하여 必要한 것들을 一般 恩惠로 내려주실 뿐만 아니라, 子女인 우리에게는 普通 恩惠 위에 特別한 恩惠를 내려주시되 箇箇人의 必要에 따라서 各其 所願을 天父께 祈求케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게 向하신 이 큰사랑과 善意와 義로우심과 全能을, 그 子女답게 確實히 믿고 依支하면서 天父께 祈禱함이 마땅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榮光 가운데 그 豊盛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너희 念慮를 다 主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眷顧하심이니라”(벧전 5:7).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主 곧 우리의 救援이신 하나님을 讚頌할지 로다”(시 68:19).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義人의 搖動함을 永永히 許諾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이러하신 하나님이심을 늘 생각하고 믿음에 서서 祈禱하는 것아 좋습니다.
天父와 子女의 關係에서 우리가 祈禱하여 交通한다 할 때에 늘 銘心해야 할 또 한 가지 重要한 것은 우리가 天父님의 사랑과 善意를 信賴하고 祈禱를 드리는 것뿐 아니라 子女인 우리는 子女답게 天父님을 사랑하는 心情에서 祈禱를 드려야 한다는 道理입니다.
어떤 大 事業家가 그 事業의 重要한 一部를 사랑하는 아들에게 맡기고자 그 아들을 敎育하고 訓練시킨다고 하십시다. 이런 때에 그 아들이 只今 自己에게 必要한 것들을 아버지께 求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아버지의 마음과 큰 計劃을 考慮하지 않고, 아버지의 사랑을 濫用하는 것도 掛念치 않고 오직 제 慾心만 채우려고 가지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함부로 求해야 하겠습니까? 決斷코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아버지의 큰 經營을 硏究할 것이요, 將次 自己에게 맡기시려는 일을 좀 더 알아보겠고, 또 自己가 求하는 것이 아버지께 或是라도 괴롬과 슬픔을 드려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鎭重히 檢討하고 整頓할 것입니다. 요컨대 아들이 아버지를 眞正으로 사랑한다면 自己 생각과 말이 아버지께 기쁨이 되도록 勞力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子女인 우리가 天父께 무엇을 祈求하더라도 天父님께 向한 眞正한 사랑이 있다면 우리 祈求가 天父님께 기쁨이 되기를 바라서 먼저 天父님의 하시는 일과 또 天父님께서 우리를 쓰시사 나타내시려는 것들과 우리 위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聖意를 鎭重히, 깊이 알아보며 硏究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바른 姿勢입니다.

祈禱者가 反省할 일
여러분, 우리의 祈禱가 하나님께 向한 사랑의 發露이기를 바랍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主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눅 10:27; 신 6:5; 마 22:37) 이 말씀은 가장 크고 첫째되는 誡命으로서, 特히 우리가 祈禱할 때는 하나님께 對한 우리의 사랑이 얼마만큼이나 있는가를 드러내는 터이지만, 天父께 對한 우리의 사랑이 참으로 弱하다는 것을 때때로 切實히 느끼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求하기 前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 天父께서는 이렇게 다 아시는데 우리는 왜 天父께 求하는 것입니까? 이제 그 까닭을 嘗考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各自의 所要를 祈求하려 할 때, 祈禱하기 前엔 먼저 告하려는 것들을 心中에 整列하게 됩니다. 平素에는 잘 整頓하지 아니했던 項目들을 하나님 앞에 整然히 懇求하기 爲하여 明瞭하게 整頓하게 됩니다. 이런 때에 ‘나는 왜 이 項目들을 하나님께 祈求해서 應答을 받고자 하는가?’ 하고 反省할 期會를 얻게 됩니다. ‘내게는 只今 이러이러한 條件들이 具備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왜 내게는 그런 條件들이 具備되어야 하는가? 내가 지금 經營하고 있는 生活과 事業이 무엇이기에 그 條件들을 요하는가? 나는 大體 누구를 爲하여 이런 生活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기를 願하는 것들의 當否를 檢査할 때 그러한 條項이 내게 必要한 것들이라고 判斷하고 判定한 張本人, ‘自己’라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果然 正當한가의 與否를 다시 한번 거룩한 道理에 비춰서 批判해 보면서 나 自身이 하나님과 바른 關係를 維持했는가를 깊이 反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反省은 언제나 좋은 것이지만 特히 하나님께 무엇을 懇求하기 前에 하는 것이 有益할 것입니다. 祈禱하기 前에만 反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祈禱를 卽時 應答치 아니하시고 오래 끌고 가시는 때에도 내가 祈禱한 內容을 다시 생각해 보고, 또 그러한 懇求를 하는 自己 自身을 다시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또는 하나님께서 祈禱를 全然 應答지 아니하시는 境遇에도 祈禱者는 同一한 懇求만을 하나님께 되풀이할 것이 아니라, 祈禱의 內容과 自身을 깊이 反省하여서 祈禱가 上達되지 않은 까닭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所要를 다 알고 계신 天父께서 우리에게 祈禱하게 하신 까닭의 하나는, 祈禱하기 前에 或은 祈禱의 下答을 받기 前에 自己의 祈禱의 內容과 自己 自身을 反省하는 期會를 가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生存과 活動에 必要한 것들은 一一이 祈求하지 아니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例를 들면 太陽의 비췸이라든지 空氣, 물, 우리 肉身의 여러 機關의 作用, 또는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 등입니다.
우리 各人의 所要의 어떤 것들은 各人이 天父께 祈求하게 하신 後에 내려주십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求하지 아니 함이요”(약 4:2). 얻으려면 求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祈禱하라”(살전 5:17). “아무것도 念慮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祈禱와 懇求로 너희 求할 것을 感謝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天父께서는 우리가 求하기 前에,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눅 12:7; 마 10:30)고 하신 것처럼 우리의 모든 事情을 細細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하신 天父께 무엇을 얼마만치 祈禱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롬 8:26). 그래서 잘못 祈禱하는 일도 많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祈禱를 全然 들어주시지 않은 境遇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祈禱를 들어주시는 例도 많습니다. “그를 向하여 우리의 가진 바 膽大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求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求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求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여기에서 “그의 뜻대로 무엇을 求한다”는 意味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祈禱하려면 먼저 그의 뜻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여기 “그의 뜻”이란 人間이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킵니다. 人間은 스스로 높고 높으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는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聖意를 啓示하셨으며 또한 그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그 마음에 聖神님으로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聖神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恩惠로 주신 여러 것들을 알게 하시는 분이십니다(고전 2:12). 聖神은 眞理의 神이시라 우리를 眞理 가운데로 引導하여 주십니다(요 16:13).

하나님의 뜻대로 求함
하나님께서는 人間에게 하나님의 뜻의 여러 가지를 이미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을 記錄해 놓은 것이 聖經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닫고 遵行하고자 하는 者는 하나님의 말씀을 熱心히 工夫해야 할 것입니다. 眞正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行하려는 사람에게는 聖神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사 聖經 말씀의 뜻을 점점 더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 사람은 그 聖意를 바로 實行하기 爲하여 하나님께 祈禱하게 될 것입니다. “그의 뜻대로 무엇을 求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우리의 모든 必要, 需要를 다 아시는 天父께 子女인 우리가 各人의 細細한 問題들을 祈禱로 아뢰어야 할 까닭의 또 하나는 世上 사람이 自己에게 닥친 大小難易의 問題들을 解決하려고 할 때에는 最先을 다하여 가장 有效한 方法을 세운後, 目的 達成을 爲하여 自力뿐 아니라 他力을 보태서 勞力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子女는 모든 問題를 天父께서 기뻐하시는 뜻대로 解決하여 주시기를 바라서 天父의 智慧와 能力을 完全히 믿고 依支하며 그 行하심을 바라고 기다립니다(시 62:1). 이때에 天父께서 그 子女가 마땅히 行하여야 할 것을 깨닫게 하시면 子女 된 者는 곧 順從하여 行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을 때에 그 일을 스스로 다시 念慮할 것은 아니나(벧전 5:7; 빌 4:6), 自己가 마땅히 行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主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빌고 注意하여 찾아서 그것을 行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自己 行步를 操心하여 반드시 聖神의 引導를 받아 가야합니다. 이런 思想은 東洋의 “盡人事而待天命”과 달라서 오직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는다는 道理입니다.
이와 같이 나의 모든 問題를 天父께 告하고, 依支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解決하는 일은 나에게 天父님의 뜻과 사랑과 能力을 더욱 깨닫게 합니다. 또한 天父님의 子女다움이 점점 더 顯著해서 땅 위에 그를 두신 天父님의 뜻을 더욱 나타내게 합니다.
祈禱할 때 반드시 頭序를 차곡차곡 따지듯이 할 것은 없으나, 大體로 祈禱를 할 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能力과 計劃과 일이라는 것을 먼저 念頭에 두고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내 幸福, 내 不足한 것, 내가 잘 되는 것” 이런 나(我)라는 것에다 重點을 두고 하는 祈禱는 事實上 좋은 祈禱가 아닙니다. 우리 主님도 祈禱를 가르치실 때에 恒常 하나님, 그 나라, 그 榮光, 그 權能, 이것을 먼저 앞세우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 權勢가 크게 높임을 받아야겠다. 우리에게 날마다 顯著하게 그 나라의 狀態가 있어야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하늘에서 다 이루시지 아니 하셨습니까?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자, 이루어 주십시오. 여기 제가 있습니다” 하는 態度를 먼저 取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祈禱한 다음에 우리가 每日 必要한 것을 求하는 것이고 自己 罪, 自己 弱點, 人間에 對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人間은 軟弱한 까닭에 試驗에 빠져들기가 쉬운 것입니다. 惡한 것이 와서 그 사람이 아무 짓도 안 했을지라도 헐뜯고 辱하는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怪惡한 邪鬼가 이 世上에서 虛榮과 慾望과 그릇된 慾心을 가지고 살면서 하나님의 道理의 大道를 바로 생각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支配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첫째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큰 뜻을 따라가지 않고, 제 속에 있는 人間의 欲情을 中心으로 行動할 때에 惡한 勢力은 틈을 타고 뛰어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람이 名譽慾에 눈이 어두워 돌아다닐 때는 邪鬼가 꽉 支配해서 感化로 主張하기도 하고, 마음 가운데 그릇된 人間의 肉情을 가지고 움직일 때에도 틈을 타고 들어와서 怪狀하게 하나님의 敎會에 搖動을 일으키거나 그릇된 일을 하게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子息으로서 하나님과 늘 거룩한 交通을 하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하나님과 거룩한 交通이 없고 祈禱를 날마다 한다고 하지만 밥 먹을 때하고, 잠잘 때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한번씩 하는데, 그나마 自己 이야기만 중얼중얼 한 다음에는 “아멘” 하고 마는 사람들에게 發生하는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그러한 狀態 가운데 빠져들어 가지 않게, “그런 惡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하고 祈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惡한사람들이 입을 놀리고 謀害하고 中傷하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伸寃하시지 아니하시면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막아 주시옵소서. 主님, 伸寃하시옵소서.” “저희가 惡에 빠져들지 않게 합소서”하고 祈禱해야 하는데, 그것은 惡한 者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進行을 妨害하거나 또 그 나라의 거룩한 열매가 나오려고 할 때에 搖動을 해서 毁破하려고 惡을 行하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그런 것을 막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故로 “惡에서도 건져 주시옵소서” 하고 祈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祈禱할 때에 우리에게 必要한 物質的인 要求나 눈앞에 띄는 몇 가지 重要한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自身이 世上에서 存在하는 目的, 이 世上에서 일을 해 나갈 使命, 自己가 行步하는 길 등을 恒常 重要한 原則으로 생각하면서 求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自己가 가는 길이나 그 方法이 있기 前에 벌써 하나님의 經營이 다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計劃하시고 經營하시니까 “하나님의 經營과 計劃이 이루어지길 비옵나이다.” 하고 祈禱하는 것이 참 重要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祈禱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交通이다” 하는 것을 銘心해야 합니다.

祈禱
거룩하신 아버지, 저희가 오늘도 祈禱란 一方的인 것이 아니라 아버님과 바르게 交通할 수 있게 하는 거룩한 恩惠의 方途임을 배웠사옵나이다. 저희가 아버님 앞에 祈禱를 할 때 恒常 아버님을 念頭에 두고 늘 祈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사랑과 權能과 榮光과 計劃과 經營을 念頭에 두게 하옵소서. 저희가 거짓된 慾望으로 마음이 浮虛하고 그릇된 慾望으로 空虛한 信仰 가운데 빠질 때 邪鬼와 搖動하는 것들이 그릇된 影響과 거짓말을 불어넣어서 저희로 하여금 怪惡한 일들을 저지르는 狀態로 몰아가기 쉽사오니 惡한 魔鬼에게 틈을 주지 않도록 恒常 깨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進行에 큰 障碍를 놓고 毁破하는 怪惡한 일들을 저지르는 모든 것들을 主께서 審判하시고, 主의 거룩하신 敎會와 神靈한 나라를 거룩되이 세우시며 前進시키시옵소서. 主님, 이리하여서 저희가 아버님과 恒常 거룩한 交通을 하면서 아름답게 살아가게 하시고, 저희의 마음을 다 아시는 아버님께서 主님의 마음을 親히 우리에게 보여 주셔서 서로의 마음을 理解하고 깨닫고 아는 거룩한 사랑의 交通을 가지게 하시옵소서.
主 예수님 이름으로 祈禱하옵나이다. 아멘.


  추천하기   목록보기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추천 조회
708  第10講 하나님의 뜻을 所願하는 生活    전홍엽 2018/08/18 126 646
707  第9講 讚頌드리는 生活    전홍엽 2018/08/09 129 649
706  第8講 예수님의 弟子로 사는 生活(2)    전홍엽 2018/07/30 145 715
705  第7講 예수님의 弟子로 사는 生活(1)    전홍엽 2018/07/17 142 683
704  第6講 하나님과 交通하는 生活(2)    전홍엽 2018/07/03 143 632
 第5講 하나님과 交通하는 生活(1)    전홍엽 2018/06/28 148 786
702  第4講 生命의 聖神의 法이 主張하는 生活    전홍엽 2018/06/14 130 712
701  第3講 眞理를 分別하고 깨닫는 生活    전홍엽 2018/05/30 131 736
700  第2講 重生을 體驗하는 生活    전홍엽 2018/05/24 138 706
699  第1講 重生前의 生態    전홍엽 2017/06/07 161 1049
698  第10講 그리스도에게서 眞理를 배운 사람의 生活 態度    전홍엽 2016/12/10 201 1247
697  第9講 빛 가운데서 行하고 眞理 가운데서 行하는者들    전홍엽 2016/11/10 237 1324
696  第8講 生命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그 말씀대로 行함    전홍엽 2016/10/22 157 1056
695  第7講 하나님과 사귐이 있으면 거룩한 變化    전홍엽 2016/10/13 179 983
694  第6講 聖徒의 사귐은 眞理 안에서 이루어짐    전홍엽 2016/10/06 172 1211
693  第5講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하시는 사귐    전홍엽 2016/09/17 157 1174
692  第4講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의 열매    전홍엽 2016/09/09 156 1108
691  第3講 聖徒의사귐은 하나님을 敬畏하고 서로 사랑함    전홍엽 2016/08/26 205 1218

    목록보기   다음페이지 1 [2][3][4][5][6][7][8][9][10]..[40]   [다음 10개]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