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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講 重生前의 生態
전홍엽  2017-06-07 16:40:10, 조회 : 1,245, 추천 : 202

여기에 올린 글들은 고 김홍전 박사님의 강설 내용인데 제가 존경하는 문홍길 목사님께서 저에게 전하여 주신 것입니다.
문홍길 목사님은 2017년 6월 3일 8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소천 하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래면서 중단했던 글을 다시 여기에 올려 읽으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셨으면 마음으로 다시 올리는 것입니다.  
읽으시는 중에 한글과 한문에 오자가 있을 수 있으니 널리 이해하시며 읽으시고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되시기 바라는 마음입니다.  

第1講
重生前의 生態
요 3:1-21
1○바리새人 中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人의 官員이라 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當身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先生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當身의 行하시는 이 表蹟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예수께서 對答하여 가라사대 眞實로 眞實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番째 母胎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5예수께서 對答하시되 眞實로 眞實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聖神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肉으로 난 것은 肉이요 聖神으로 난 것은 靈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奇異히 여기지 말라 8바람이 任意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聖神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9니고데모가 對答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先生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11眞實로 眞實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證據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證據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하늘에서 내려온 者 곧 人子 外에는 하늘에 올라간 者가 없느니라 14모세가 曠野에서 뱀을 든 것같이 人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저를 믿는 者마다 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世上을 이처럼 사랑하사 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者마다 滅亡치 않고 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世上에 보내신 것은 世上을 審判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世上이 救援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저를 믿는 者는 審判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者는 하나님의 獨生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審判을 받은 것이니라 19그 定罪는 이것이니 곧 빛이 世上에 왔으되 사람들이 自己 行爲가 惡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惡을 行하는 者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行爲가 드러날까 함이요 21眞理를 좇는 者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行爲가 하나님 안에서 行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그 동안 우리 敎會에 새로운 敎友들이 많이 오셨으므로 오늘 아침에는 우리 敎會가 가지고 있는 本來의 性格을 이야기하기 前에 예수 믿는 道理의 가장 基本的인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새로 온 敎友들께서는 이 基本的인 道理를 明確하게 알고 깨달아야 하겠고, 우리 敎友들도 때를 따라서 自己를 反省하면서 믿는 道理의 基本이 무엇인가, 나는 그것을 바로 쥐고 있는가, 그 事實이 내 안에 分明히 生動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仔細히 하나하나 긴 說明은 하지 않을지라도 基本的인 것을 잘 把握하고 있으면, 나 自身이 그것을 確實히 實證하고 있는가를 反省할 수 있는 重要한 材料가 됩니다.

罪로 審判 받은 狀態
恒常 第一 重要한 것은 新生 或은 重生이라는 問題입니다. 重生을 말할 때 우리는 먼저 스스로 重生하지 못할 우리의 腐敗와 墮落의 狀態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지만 사람은 犯罪하여 하나님 앞에 犯罪한 者가 當然히 받을 罪의 刑罰이 있고, 罪로 말미암은 우리의 本質上 墮落의 狀態가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이 世上에 그 아드님을 보내신 것은 世上을 審判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 아드님으로 말미암아 이 世上을 救援하시려고 하신 것이요 저를 믿는 者는 그런 審判에 들어가지 아니하거니와 믿지 아니하는 者 卽 罪에 對해서 하나님께서 準備하신 恩惠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獨生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審判을 받은 것이니라.”(요 3:17-18)고 하셨습니다. 이미 宣告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中心으로 믿었다는 確證 곧 重生의 事實이 내게 있다고 告白할 만한 것이 없으면, 果然 그가 重生하였는지 證明할 길이 없습니다. 萬一 重生하지 아니 했다면 믿지 아니한 것이고, 믿지 아니하는 者는 벌써 審判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事實에 對해서 그렇지 않다고 별다른 意見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明白하게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저를 믿지 아니하는 者는 獨生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審判을 받은 것이니라”(요 3:18). 그 審判, 定罪받은 徵表는 이것입니다. “곧 빛이 世上에 왔으되 - 사람은 예수 믿는 거룩한 道理와 그리스도를 좇아서 重生의 生活을 해야 할 것이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임에도 不拘하고 그가 비록 傳道者의 傳道를 듣고 或은 親舊의 勸告를 듣고서 禮拜堂에는 나와 說敎를 들을지라도 - 사람들이 自己의 行爲가 惡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는 말씀처럼, 그 말을 듣는 것보다는 自己의 世界에서 그냥 살겠다 하는 것입니다. 自己의 世界에 살면서 自己 나름대로 基督敎를 解釋해 가지고 基督敎를 한 個의 修養 團體나 人生 生活의 한 部分으로 여겨서 宗敎로 攝取하고 사는 것입니다. 반드시 排斥한다는 意味는 아닙니다. 이렇게 함으로 自己의 惡을 더 기뻐한다는 事實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뭐가 惡하냐” 하겠지만, 이 世上 사람들이 말하는 “저 사람은 惡하다”는 그런 말이 아니고, 惡이라는 말뜻이 元來 完全에서의 缺乏을 表示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種類의 惡이 있고, 때로는 所謂 必要惡이라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그 밖의 惡에는 物理的인 惡, 肉體的인 惡이 있습니다. 그건 이지러진 狀態입니다. 穩全한 身體가 아니고 不拘의 身體일 때는 肉體的인 惡이라고 합니다. 經濟的인 惡은 甚한 貧困입니다. 自己의 生存에 相當한 收入이 있어서 生活을 지지 받아야 할 터인데, 먹으려고 해도 먹을 것이 없을 때는 經濟的인, 或은 社會的인 惡이라 합니다. 社會上 惡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社會의 不均衡과 많은 缺乏으로 많은 사람이 不可避하게 當하는 苦痛을 惹起시키는 것들을 社會惡이라고 합니다.
또 道德 惡이 있습니다. 이것은 道德上 當爲의 缺乏입니다. 道德的인 缺乏이 있을 때는 罪라고 합니다. 그런고로 모든 惡이 罪는 아닐지라도 道德 惡은 罪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絶對 公義의 屬性
이 罪는 하나님께서 늘 嚴格하게 審判하십니다. 하나님의 絶對 公義의 屬性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이 사람을 容恕한다는 式의 容恕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요 사람이 아니신 까닭입니다. 사람은 自身에게 허물을 끼친 사람을 容恕할 때, “나 自身도 허물 있는 人生인 까닭에 나도 어느 때는 저런 罪를 짓기도 하겠다. 나도 不完全한 까닭에 不完全한 나로서 남을 徹底히 追窮을 할 수 없다”는 自己 스스로의 反省과 評價에서 容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完全하시고 絶對 公義이시며 公義와 善과 眞理의 總體, 總和가 되시는 까닭에 무엇을 꺼려서 審判하시지 못할 理由도 없을 뿐더러 하나님의 絶對 義라는 屬性이 不義한 것을 그냥 看過할 때는 그 義의 屬性에 惡이 招來되는 것입니다. 그런故로 하나님은 自己 屬性을 滿足시키기 爲해서라도, 다른 말로 하면 絶對 義는 그것이 絶對 義인 까닭에 不義를 容認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哲學的인 命題로, 여기 絶對 義라는 것이 있다 할 때 그 絶對 義가 不義를 容認한다면 絶對 義의 位置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絶對 義가 하나님이시라면 하나님은 不義를 容許하지 못하십니다. 그런 까닭에 不義를 그냥 看過하실 수 없으신 것입니다. 그런故로 不義를 審判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罪를 犯하면 絶對 義이신 하나님 앞에, 絶對 聖義이신 하나님 앞에 반드시 討罪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本質上 罪를 가지고 있는 까닭에 이미 定罪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定罪받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定罪란 審判 宣告, 或은 裁判 宣告를 받았다는 말인데, 이 裁判 宣告를 받았다는 事實은 基督敎에 들어올 때 第一 먼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贖罪를 받지 아니한 以上 하나님께 裁判 宣告를 받아야 하는 것이지,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法이 없습니다. 이 事實은 하나님께서 그 宣告 內容에 對한 거룩한 執行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執行은 單回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 罪를 犯하면 罰金刑에다 自由刑을 받을 수 있습니다. 假令 禁錮나 懲役에 罰金을 兼해서 賦課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罰金은 罰金대로 물고, 懲役은 懲役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萬一 大罪를 犯했을 때는 最高刑으로 生命刑을 받고 게다가 어느 때에는 財産을 沒收當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런 刑法의 槪念으로 볼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刑罰은 살아서나, 죽어 來世에 있어서나 다 갚지 못하는 것입니다.
罪는 하나님을 對象으로 犯한 까닭에 하나님의 거룩한 道를 犯한 것입니다. 假令 사람이 사람에게 잘못했을 때 “사람이 사람에게 잘 못해서는 아니 된다”는 法則을 어긴 까닭에, 그 法則을 내신 하나님께 反抗한 것이 됩니다. 잘못하여 사람에게는 害를 끼치고 하나님께는 犯罪하는 것입니다. 그때, “내가 여호와 主께만 犯罪하였나이다”(시 51:4)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眞正으로 누구를 犯하는 것은 하나님을 犯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法則을 犯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거룩한 意思를 犯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絶對 義는 罪를 容認할 수 없기 때문에 定罪하신 그대로 審判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審判이 있는 것을 漫忽히 생각하고 마음이 驕慢하고 頑悖한 사람에게는 “자주 責望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敗亡을 當하고 避하지 못하리라”(잠 29:1)는 하나님의 嚴肅한 宣言이 있습니다. 責望하시며, “注意해라”하는데도 “그럴 수가 없다”고 한다면 갑자기 滅亡을 當하는 것입니다.
萬一 이 世上에서 公義의 法則을 아주 없이해 버린다면, 社會 秩序는 사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전혀 사람이 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秩序가 確固할수록 公義의 法則은 더 明瞭한 것입니다. 穩全한 秩序가 있는 곳에는 穩全한 公義가 있고, 穩全한 公義가 있는 곳에 罪에 對한 穩全한 審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故로 이런 審判을 받는 社會는 公義가 臨한 것입니다. 公義가 臨한 까닭은 絶對의 하나님, 完全하신 하나님께 對한 犯則 때문에 그의 法則의 適用 對象이 된 것입니다.
罪를 어떤 분에게 犯했는가에 따라서 罪의 性格이 重해지기도 합니다. 늘 잘 쓰는 例지만, 조그마한 아이에게 “네 이놈”한다고 해서 큰 罪가 되지 않습니다. 이뻐서 “네 이놈”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에서 사랑의 意思를 느낀다면 오히려 기뻐할 것입니다. 對等한 親舊에게 아무리 親하다고 해도 ‘이놈, 저놈’ 한다면, ‘저가 나한테 遺憾 있어서 하는 말인가’ 하고 異常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좀더 年長된 사람보고 “네 이놈” 한다면, 相當히 詰問을 받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높은 분한테 “이놈” 한다면, 이때는 罰이 더 重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더 올라갈 수 없이 높은 분한테는 至極히 작은 犯過도 重大한 罪責을 지게 됩니다. 하물며 絶對이신 하나님 앞에서는 至極히 微微한 犯過라도 絶對 結果를 招來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罪의 結果
絶對 結果는 絶對로 永遠한 刑罰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當然한 論理인 것입니다. 이런 論理에서 사람은 永遠한 刑罰을 받습니다. 永遠한 刑罰은 죽어서 地獄 가는 刑罰만이 아닙니다. 聖經은 累累이 罪의 刑罰에 對해서 “惡한 일의 懲罰이 速히 實行되지 아니하므로 人生들이 惡을 行하기에 마음이 膽大하도다”(전 8:ll)라고 합니다. 惡한 일에 對한 報應이 當場 實行이 안 되니까 마음이 惡해져서 거짓말 잘하고 재주 잘 부리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社會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社會가 腐敗하고 墮落하여 法의 眼目만 슬쩍 가려서 눈속임해도 相關 않는 世代가 된다면 世上은 至極히 살기 어렵고 괴로운 社會가 될 것입니다.
그런 社會 風調는 黑暗이지 光明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公義가 없고, 情實이 全部 支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社會를 누구든지 마음에 있는 一般的인 公義의 觀念과 要求에 따라 唾罵하면서도, 그런 데서 裨益을 받는 사람은 좋다고 합니다. 그런 社會는 不健全한 社會입니다. 公正한 사람은 公式대로 하는 社會가 좋은 것입니다. 公式대로 안 되고 非公式대로만 되는 社會라면 非公式으로, 재주껏 사는 사람일수록 좋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黑暗의 狀態, 個人의 黑暗과 罪에 對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個人의 그릇된 일과 하나님을 어긴 일에 對해서 이미 定罪하시고 審判을 宣告하신 까닭에 언제든지 願하시는 때 刑을 執行하십니다. 이 말은 언제든지 單番에 全 刑量을 執行하신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必要한 때에 必要한 量을 執行하신다는 말입니다. 事實上 이 刑의 執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 괴로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膽大한 理由는 ‘惡한 일의 報應이 그렇게 쉽게 執行되지 않더라’ 하는 이런 暗昧 가운데 빠져서, ‘남들도 그렇게 하고 잘 살더라.’ ‘어떤 사람은 惡하고 慾心 부려도 오히려 잘되고, 어떤 사람은 勤儉하더라도 오히려 가난할 뿐이더라’는 생각을 하는 까닭에 그렇습니다. 이런 現狀이 오늘날뿐 아니라 古代에 箴言을 말한 智慧者가 自己 時代를 보았을 때도 그랬습니다.
“暫時 後에 惡人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仔細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시 37:10). 사람의 義의 要求라는 것이 詩人의 詩的 要求 가운데 代表로 나와 있는데 “惡한 者의 惡을 없기까지 찾으소서”(시 10:15). 다시는 찾아볼 수 없게 完全히 消滅하시고 塗抹하시기를 詩人은 祈禱했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要求는 누구든지 公義의 精神이 깊으면 깊을수록 있을 것입니다.

罪에 對한 刑罰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하시는가, 世上 사람들은 犯罪에 對해서 다른 사람도 모두 그렇게 산다고 膽大하지만 언제 不意의 事態가 와서 懲罰하실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罪의 刑罰은 이미 잘 아시는 대로 恒常 두 가지 形態로 臨합니다. 첫째, 一般的인 法則인 自然法에 依한 罪의 刑罰입니다. 自然法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내신 一般的인, 物理的인 法則으로 罪의 刑罰을 내려가는 것입니다. 例를 들면, 自然法에서는 콩을 심어 一定한 時期가 지나면 콩을 거둡니다. 이와 같이 罪를 심어 놓으면 一定한 期間 안에 罪의 結果를 거두는 것입니다. 젊었을 때 放蕩한 罪를 繼續해서 犯하고 나이 먹으면 다른 사람보다 기운이 虛하고 힘이 없어져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됩니다. 壽命도 짧아지게 됩니다. 箴言에도 “내가 왜 내 先生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내가 왜 智慧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젊어서 放蕩을 했던고! 아, 늙어서 나는 氣運이 없고 내 壽限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고 歎息하리라”(잠언 5:11-1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注意해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不義한 곳에 自己의 몸을 함부로 淫蕩하게 내버려 둘 것 같으면 惡한 性病도 들어 어찌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自然法則입니다. 이 法則은 物質 世界에서만 準用되는 것이 아닙니다.
神靈한 社會, 다른 말로 하면 精神 世界에서도 適用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目的을 向해서 마음을 固定하고 늘 前進하는 生活을 하지 않고 恒常 이리저리 彷徨하고 自己 享樂을 追求하고 돌아다닌다면, 그 精神 狀態가 整頓되어서 長成한 사람과 比較해서 한 十 年後면 顯著한 差異가 나서 쓸모 없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精神을 集中 못 하고, 무엇을 하는데 能力이 없고, 무엇을 하되 이를 만한 아무런 技能이 없는 것입니다. 放蕩한 世界에 한눈을 팔지 않고 目標를 向해서 반듯이 前進하는 사람이라야 左右에 여러 가지 試驗이 있고, 그 試驗 때문에 마음에 苦痛이 있을지라도 自己의 目標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境遇든지 自身의 目標를 잃어버리지 않고 나가야 합니다. ‘나는 왜 사느냐’ ‘나는 무엇 때문에 이 世上에 있느냐?’ 이것을 생각하면서 자꾸 前進해 나간다면 그렇지 아니 한 사람, 卽 精神的으로 彷徨하는 사람 所謂 精神的인 蕩兒하고 比較할 때 훨씬 健康하고 健實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에서 쓰임 받는 그릇이 됩니다.
物質과 肉體의 放蕩만이 放蕩이 아니고 精神의 放蕩도 있습니다. 精神의 放蕩은 自己의 放蕩의 情慾을 스스로 로맨티시즘(Roman-ticism)이라고 美化해서 함부로 放蕩하여 그 情慾을 發散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精神을 恒常 거룩한 目標를 向해서 추어올려야겠다는 생각이 없이 放蕩하고 돌아다니면 그 사람은 쓸모없이 되는 것입니다.
經驗이 많은 사람은 그런 靑年을 보고 ‘아, 저것 希望이 없구나! 저따위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면 ‥‥‥’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게 道德的으로 이러고저러고 했다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放蕩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 儒敎 道德은 오늘날 같은 自由로운 交際를 嚴格하게 規制했는데 그것을 오늘날은 너무나 頑固하다 하겠지만, 그렇게 規制한 데는 規制할 만한 理由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젊은이들의 精神的인 肉體的인 放蕩을 막고 그들로 하여금 君子의 道를 닦아 나아가게 하려고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儒敎의 이야기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의 道理를 생각할 때, 사람들 特히 靑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自由를 行事한다는 美名下에 自由를 放縱의 길로 만들어 行한다면 아무것도 成就하지 못합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바로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的인 兄弟愛가 重要하지만 自己가 나아가는 길은 늘 반듯해야 합니다. 中心의 생각은 彷徨하지 않고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따뜻하고 親切한 것도 重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對한 그리스도에 對한 自己 中心의 至極한 誠意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고, 그것만은 全部 쥐고 나가야 합니다. 精神的으로 蕩兒가 안 되려면 그래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弟子로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分明한 條件을 充當하여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弟子가 되려면 自己 父母 兄弟 妻子 그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해야 한다”(눅 14:26; 마 10:37). 사랑에 있어서 예수님을 第一 첫째로 보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自己의 使命을 確實히 認識한 者답게 十字架를 져야 합니다. “누구든지 自己 十字架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者도 能히 나의 弟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그런 다음에는 自己에게 있는 것이라고 거기에 置心하지 말고 自己의 모든 것을 主께 드리고 自己에게 무엇인가 제 것이 있다고 생각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自己에게 있는 것을 다 버린 者의 마음 狀態입니다.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눅 14:33).

刑罰의 執行
하나님께서는 人生들이 罪를 지으면서도 罪를 反省하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하나님 앞에 求하지도 아니하고, 또 거기에 對해서 그리스도께서 定해 주신 거룩한 道理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으면 어느 때 갑자기 불러다가 하나님이 宣告하신 바 刑罰을 始作하실는지 알 수 없습니다. 部分的으로 刑罰을 始作하실 것입니다. 때로는 그 사람에게 重大한 病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치시면 病도 생기게 되지만, 왜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醫學이 發達했어도 알 수 없는 病이 있습니다. 自身의 몸이 健康하니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慾心도 내고 또 남하고 다투기도 하고 뽐내기도 하지만, 한 번 몸이 疲弊할 것 같으면 어찌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病이 모두 하나님의 치심을 받은 하나님의 刑罰의 證據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이 病이 있을 때는 오히려 그의 軟弱한 것을 쓰셔서 그리스도의 豊盛한 恩惠를 내리시는 일도 있습니다.
使徒 바울 先生에게 사탄의 使者라고 할 만한 찌르는 가시 곧 肉身의 病, 眼疾이 있어서 이것이 떠나기를 세 번 求했지만 나중에 主께서 “내 恩惠가 네게 족하다. 大蓋 내 能力은 네 軟弱한 데서 이루어진다”(고후 12:9).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고 또한 使徒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의 胃가 恒常 弱하므로 “네 弱한 胃를 爲해서 물만 마시지 말고 葡萄酒를 조금 쓰라”(딤전 5:23) 네 胃를 健康하게 만들어야겠다고 했습니다. 왜 祈禱해서, 按擦하여 낫게 해주지 않고 그렇게 勸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願하시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칼빈 先生도 末年에 차츰차츰 여러 가지 病이 重해졌고, 마틴 루터 先生도 末年에는 病이 重해서 눈 한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루터 先生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고 喘息이 있고, 몸은 허덕거리고, 허리는 굽고, 일어나면 恒常 허리가 아프고 해서 ‘참, 나도 이제는 그리스도의 품에 安息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그랬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가 六十이 되어 그렇게 썼습니다. 요새 같으면 六十의 나이에 그렇게 될 것이 아닌데 激務에다 激烈한 性格이라 改革 運動을 하면서 衰弱해졌습니다.
칼빈 先生은 60까지도 살지 못하고 不過 55歲 좀 넘어서 돌아가셨는데 그분도 末年에는 걸어다니는 病院이라고 할 만큼 病이 많았습니다. 喘息까지 있어서 說敎하다가도 기침을 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는 歐羅巴 最高의 說敎者였습니다. 그를 가리켜 모두 眞理를 가장 깊게 가르치는 先生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弱한 데서 强烈한, 猛烈한 精神力을 가지고 가르칠 것을 그대로 가르치고 末年에 죽기 二 三 日을 除外한 一生 쉬지 않고 繼續한 것은 偉大한 힘을 表示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께서 한 가지 願하시는 바이지만, 疾病이나 肉身의 軟弱이 반드시 다 그런 좋은 意味를 가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恩惠를 兼해서 病이 오는 特殊한 사람도 있지만 普通 사람은 身體에 障碍가 있으면 큰 浪費를 하게 됩니다. 마땅히 할 것을 못 하게 됩니다. 一般的으로 몸이 軟弱하면 精神도 薄弱해지는 것이고 나중에는 世上이 다 귀찮아지고 마음도 悲觀하게 됩니다. 强한 意志를 가지고 ‘무엇인가 이 世上에 나온 보람 있는 生活을 하겠다’는 精神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便으로 갑자기 激烈한 病이 臨하면, 困難과 괴로움 가운데서 自己를 反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反省하게 하는 것이 最後의 目的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不信者들에게 刑罰을 내리시는 것은 그들의 反省과 人格의 陶冶, 鍛鍊 같은 敎育的인 目的을 가지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絶對의 義 때문에 그 義를 侵犯한 罪惡을 刑罰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刑罰로 天變之災가 그에게 臨할 수 있고 또 갑자기 生活 根據가 全部 없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 사람의 목숨이 땅에 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이 차라리 떨어졌으면 괜찮았겠다 하는 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實地로 그 患難 속에서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목숨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지 만, 땅 위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罰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반드시 悔改를 하거나 道德的으로 더 向上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主를 믿지 않고 主님께서 주시는 모든 恩惠를 疏忽히 여기고 마음이 驕慢하여 건방진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震怒하시사 내리시는 刑罰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震怒를 붓기 始作할 때에는 걷잡을 수 없고 아무도 抵抗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그 사람이 당하는 큰 患難을 代身 ‘내가 當해 준다’고 못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들어 가는 것이 무서 울진저”(히 10:31). 하나님을 漫忽히 여기고 제멋대로 사는 줄 아는 사람은 이런 일을 當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안 當하고 사는 것같이 보이니까, 그 反對의 悲慘과 큰 患難을 생각지 못하고 하나님의 무서운 震怒를 두려워할 줄도 모릅니다. 그 暗昧는 빛보다 어둠을 더 좋아하는 者의 것이요 어리석은 者의 것입니다. 大體 人生을 언제 透徹하게 바라본 적이 있는가? 人生의 모든 괴롬이나 어려움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社會的 硏究도 해본 일이 없고 自己 눈에 뵈고 들리는 대로 健康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만을 바라보면서, 自己들도 저렇게 健康하고 平安하기만을 期待하고 있습니다. 이날 이때까지 하나님께서 참으시고 기다리신다는 것을 모르고 恒常 頑悖하면, “자주 責望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으면 갑자기 滅亡 當함을 免치 못하리라”(잠 29:1) 이것이 하나님의 嚴肅한 말씀입니다. 이런 데서 건져내시기 爲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그리스도의 救援의 道理를 믿으라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救援의 道理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滅亡을 받을 사람은 現世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刑罰을 받고 죽은 後에 來世의 始作에서부터도 무서운 刑罰 속으로 들어갑니다. 罪의 刑罰은 모든 사람이 꼭 同一한 刑量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눅 12:47). 이렇게 自己의 罪責으로 말미암아 永遠한 刑罰을 받을 수밖에 없으며 또는 犯罪함으로 말미암아 罪의 奴隸가 되어서 질질 끌려가는 罪人들을 건지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世上에 보내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그 거룩한 恩惠는 十字架의 功勞로 因한 贖罪의 事實입니다. 贖罪의 事實은 罪가 있는 사람은 罪 때문에 刑罰을 받은 것이고 罪 때문에 問題가 생긴 것이니까 그것을 贖해야겠다는 것입니다.

腐敗와 墮落의 事實
贖罪의 事實로 첫째, 罪의 刑罰을 免除하신다는 것도 重要하지만 둘째로 重要한 問題는 罪를 犯한 사람은 罪로 말미암은 腐敗가 그 속에 있어서, 한번 罪를 犯하면 罪를 犯한 腐敗로 말미암아 그는 罪로 汚染된 者라고 評價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罪를 犯하지 아니한 사람과 罪를 犯한 사람 사이에는 明確한 區別이 있어서, 罪를 犯한 사람은 犯罪한 歷史가 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歷史는 무엇으로도 지을 수 없습니다. 나중에 改過遷善해서 聖者가 됐어도 그 歷史는 그가 過去에 犯罪者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罪를 이기지 못하고 犯하는 程度의 弱한 人物이었다는 것을 意味합니다. 어떤 사람이 犯罪하였으면서도 悔改치 아니하고 그냥 지내면 그것은 그가 犯罪할 수 있는 可能性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表示입니다. 그 可能性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罪로 말미암아 사람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法則을 어기는 位置로 떨어졌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기는 位置로 떨어진 사람의 속에는 恒常 腐敗한 事實이 있습니다.
腐敗와 墮落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血統을 通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孟子가 性善說을 主張했지만 生活의 經驗과 하나님의 말씀의 明確한 가르침으로 보아서 사람 속에 根本的으로 腐敗가 늘 있어서 어리면 어린 만큼, 크면 큰 만큼 나타나는 것입니다. 技能도 優秀하면 優秀한 만큼, 腐敗도 優秀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恩惠로 별다른 마련이 있기 前에는 腐敗와 墮落의 本性은 아무리 그 사람이 柔順하고 훌륭하고 紳士淑女인 것같이 보이고 窈窕淑女와 같이 보이고, 大人君子, 道德的인 人物, 聖者같이 보일지라도 腐敗는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腐敗라는 것은 自己 마음 가운데 여러 가지 幻像을 그려 不義와 惡을 늘 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佛敎에서는 그 말을 “心如工畵師” 卽 마음이라는 것은 재주 있는 환쟁이와 같다 하여 요것도 그려보고 저것도 그려보고 가지각색 생각을 해서 그것을 놓고 幻想的으로 미워도 했다가 좋아도 했다가 기뻐도 했다 또 울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聖經에서도 “마음이라는 것은 萬物보다 腐敗하고 거짓된 것이요, 누가 이를 알리요”라고 가르쳤습니다(렘 17:9). 사람은 이런 腐敗한 心情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罪의 腐敗와 墮落이라는 것은 사람이 道德的인 義務를 履行치 못하게 하는 根本的인 缺陷인데 이것을 惡이라고 하며 이런 道德的인 惡을 罪라고 합니다. 사람이 腐敗하고 墮落하면, 普通 社會의 레벨에서는 自身의 껍데기를 꾸미고 지내지만 어떤 義와 善에 올라가고자 할 때에는 强한 牽引力이 있어서 잡아 눌러 올라갈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가령 어느 程度만큼 勞力해서 善을 이룬다 할지라도 이루는 그 善이라는 것은 마치 聖經이 가르친 바와 같이 “우리의 義라는 것은 다 더러운 옷을 입은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사 64:6). 純潔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尺度에는 멀어서 미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은 勞力해서 聖者의 位置에 到達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要求하시는 標準은 이 땅 위에서 第一 높은 山인 히말라야의 에베레스트 峰 같은 山봉우리, 그만큼 높이 올라오면 그것이 하나님의 世界라고 가르치느냐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딴 世界입니다. 달의 世界로 가려면 月着陸 宇宙船을 타고 가야지, 에베레스트 山봉우리까지 갔다고 해서 거기서 달에 뛰어 올라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땅 위에서 自己가 勞力하고 勤勤孜孜해서 聖者의 길을 이루어 보고, 또 自己를 强하게 規制해서 훌륭한 人格을 만들어 본다고 하지만 그러한 人爲的인 成就는 하나님 보시기에 結局, 이 땅 위에서 山등성 이에 섰는 사람, 平野에 섰는 사람, 골짜기에 섰는 사람과 같은 그런 差異밖에 없습니다. 孟子의 말을 빌자면 “五十步以笑百步”라해서, 戰爭하다가 逃亡하면서 五十步 逃亡간 사람이 百步 逃亡간 사람보고 저건 百步 逃亡갔다고 비웃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 特別히 더 낫고 좋고 저희끼리 비웃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腐敗하고 墮落한 本性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義를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榮光을 얻지도 못합니다. “모든 사람이 罪를 犯하였으매 하나님의 榮光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重生의 事實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贖罪하셨다는 事實은 첫째, 罪로 말미암아 받을 刑罰의 값을 代身 치르심으로 우리는 刑罰에서 除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十字架上에서 다 當하신 것입니다. 모든 苦痛을 혼자 다 짊어지신 것이고, 地獄의 苦痛도 다 지신 것입니다. 둘째는 나에게 自由를 얻게 하셨다는 事實인데, 이 말뜻은 說明을 要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犯罪의 結果만이 解決되는 것이 아니라 永遠한 生命을 얻습니다. 말하자면 罪로 말미암은 永遠한 刑罰 곧 永遠한 滅亡을 받지 아니하는 同時에 그가 주시는 바 永遠한 生命을 얻습니다(요 3:16,36; 10:28). 이 永遠한 生命은 우리에게 새사람을 나타내게 합니다. 이 새사람은 罪의 腐敗와 相關이 없고 罪의 權勢가 支配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새사람으로 살면 罪와 死亡의 法則에서 完全히 解放된 자리에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롬 8:1-2).
우리를 이러한 새사람으로 다시 創造해서 내놓는 것이 重生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滅亡치 않고 永生을 얻게 하려하심이라”(요 3:16). “아들을 믿는 者는 永生이 있고 아들을 順從치 아니하는 者는 永生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震怒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 3:36, 요일 5:12)는 말씀대로 永遠한 生命을 얻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은 永生이 그 안에 있습니다. 그 證據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證據는 이것이니 우리가 그 永生을 받았다는 것과 그 生命은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다”(요일 5:11). 이렇게 永遠한 生命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人間的인 次元에서 決코 하나님이 願하시는 거룩한 標準에 到達못 할 것을 아시는 까닭에, 그 標準에 우리를 到達케 하시려고 새로 운 生命을 내려주셔서 새로 創造했다는 事實, 再創造하셨다는 事實이 重要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 지은 것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 創造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善한 일을 爲하여 지으셨나니”(엡 1:12-13). “그가 그 造物 中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自己의 뜻을 좇아 眞理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 1:10). 새로 創造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創造하심으로 비로소 사람이 存在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다른 짐승과 마찬가지로 흙으로 빚어 놓으시고, 그 코에 生氣를 불어넣으시니 生靈이 되었습니다(창 2:7). 여기는 사람이 生靈이 됐다는 것이지 特別히 다른 것보다도 優秀하게 됐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19節을 보면 사람이 짐승의 이름을 짓는 偉大한 叡智가 있는 것을 보여 주시고 동산을 다스릴 수 있는 能力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文化的인 命令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自己의 짝을 보고 기뻐하는 사랑의 偉大한 힘을 나타냈습니다. 이런 큰 能力을 받은 사람을 創造하실 때는 그 形態를 흙으로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世上 萬物가운데서 새로운 創造物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 創造物은 하나님의 子女들인데 이것은 흙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材料에다 하나님의 生命을 넣어 주셔서 새로운 子女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生命으로 創造하실 뿐 아니라 새 生命이 나타나게 하시려고 우리 靈魂의 技能을 變改시켜서, “너희가 그리스도를 前에는 사랑치 아니 하더니 只今은 보지는 못했어도 사랑하는도다”(벧전 1:8) 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心情을 주셨습니다.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은 사람의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새로운 創造物이 하는 일입니다. 또 “自己의 기쁘신 뜻을 爲하여 너희로 所願을 두고 行하게 하시나니”(빌 2:13) 해서 우리의 意志가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行하게 하고, 또한 우리에게 새로운 智慧를 주셔서 前에는 깨닫지 못하였던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眞理의 말씀을 우리가 깨닫고 알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 첫발을 디디는 여기까지가 重生의 事實입니다.

重生의 證據
이런 重生의 事實이 우리에게 있을 때 이미 重生함을 받았다고 믿는 우리들이 反省해야 할 問題는 重生을 무엇으로 證據하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重生한 사람인가? 新生한 사람인가? 勿論 어려서 重生해서 자라난 사람은 반드시 '어느 날 어느 때 重生했다'고 自覺을 하지 못하는 境遇가 많습니다. 이것은 아직 自己가 그것을 充分히 解釋할 만한 能力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解釋할 수 있는 能力이 있는 사람이 곧 自己의 重生을 確言하지 못하는 사람을 觀察하고 實驗하여 본다면 이 사람의 重生 與否에 對한 證明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自己가 重生했다는 事實을 가지고 있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을 觀察할 때 그 사람이 重生했는지 與否를 바로 判斷할 尺度가 없을 것입니다.
重生한 사람이 말로 聖神을 毁謗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는 것입니다(마 12:31-32). 弄談으로라도 聖神을 毁謗 못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그렇게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聖神 毁謗이 큰 罪라는 걸 알아서 그렇게 自制하는 것만이 아니라 알았을 때에는 알아서 안 하는 것이고, 몰랐을 때에는 모르는 대로 안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聖經에 聖神을 毁謗하는 罪는 今生에서나 來世에서도 赦宥받을 수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死亡에 이르는 罪가 있으니 이에 對하여 나는 求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말로 聖神을 毁謗하는 罪를 犯한 者는 다시는 容恕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라도 참으로 重生했다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했으니까 重生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重生하면 못 한다 그것뿐입니다. 어린아이에게도 重生한 事實을 알아보려면 먼저 成人에게서 重生한 열매가 무엇인지를 본 그런 것이 작은 範圍지만 어린 사람에게서 나타났는가를 觀察하면 어느 程度 짐작이 갈 것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榮光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한 사람이 重生 하였다는 말은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生命 곧 永生을 주셨다는 것입니다(요 10:28). 이 새 生命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은 그 生命이 되신 그리스도를(골 3:4)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重生을 證明하는 重要한 事實의 한 가지입니다(벧전 1:8).
重生한 者에게 그리스도에 對한 사랑이 있으니까 더 사랑하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父母나 妻子나 兄弟나 누구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라”(마 10:37). 여기에서 너희 父母나 妻子나 兄弟를 사랑하는 式으로 나를 사랑하지 말고 別다른 式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父母나 妻子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延長해서 더 熱烈하게 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 對한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는 내가 父母, 兄弟, 親舊를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런 사랑이 있으면 그것으로 비추어 봐서 그런 사랑이 그리스도에 對해서도 흘러나가고 있는가? 그렇게 따져 보라는 것입니다. 別 種類의 사랑을 따로 이야기한 것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 向한 사람의 사랑은 空中에 따로 떨어져 있는 그런 心情이 아니고, 結局 人間의 心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觀察하여 보면 몇 가지로 區分할 수 있습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사랑을 論할 때 크게 네 가지로 나누어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첫째는 血族愛입니다. 特히 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는 模襲에서 이 血族愛의 顯著한 것을 봅니다. 東洋에는 最愛一子地란 말, 곧 어머니가 외아들을 사랑하는 사랑이 最上이라는 말인데 이러한 사랑은 世上 사람이 다 아는 것입니다. 둘째는 깊은 友情 或은 同志愛가 있습니다. 셋째는 男女間의 사랑이 있습니다. 넷째는 精神的인 尊敬과 好感과 奉事의 心情으로 다만 그 對象을 좋아할 뿐 아니라 現實的으로 그 對象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을 보태어 주는 行動을 하는 사랑입니다.
高貴한 사랑은 이 네 가지 중에 어느 한 要素만을 가진 것이 아니고 이런 모든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基本的인 能力을 가장 秩序있게 發揮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다 잘 알 수도 없고, 아는 部分도 잘 表現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의 表現이 훌륭하지 못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者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以上 네 가지의 사랑 중에 어느 하나만의 能力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程度로 甚히 큰 것임을 느낄 것입니다 이 거룩한 사랑의 能力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또 우리 血族을 사랑하고 또 親舊를 사랑하고 異性을 사랑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元來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사랑의 能力, 사랑의 實質 그것은 元來 하나님이 根源이십니다. 내가 가진 그리스도에 對한 사랑도 그런 사랑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어떤 種類의 사랑인데 그리스도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려면 이 거룩한 能力을 더욱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思慕하는 心情도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바치는 心情도 있어야 하며 또 그리스도를 爲하여 效果있게 쓸 만한 것이 나에게 있는 줄로 여겼을 때 그런 것들을 그리스도를 爲하여 아낌없이 쓸 뿐더러 그런 것들이 將次에도 有效하게 쓰이기 爲하여 존절히 하되, 自己 時間, 生命, 에너지를 아끼고 自己 物件을 아껴 두는 것입니다. 自己 生活을 勤儉히 하면서 그리스도를 爲해서는 즐겁게 드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하는 表示입니다. 이 사랑이란 現實的인 것입니다. 이런 現實的인 사랑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大緞히 사랑했는데” 하는 것은 아무 所用이 없습니다. 現實에서 具體的으로 무슨 結果를 내놓느냐 그것이 重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을 注意해야 하는 것은 現實的인 結果만 내면 다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前書 13章은 하나님의 사랑에 對한 綜合的인 意味를 가르쳤습니다. 사랑한다는 口實下에서 現實的인 結果만 노리고 그 마음은 冷情하여, 相對가 現實的 도움을 必要로 하니까 그것만 주면 足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救濟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有益이 없느니라”(고전 13:3) 해서, 사랑을 가르치실 때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이라든지,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주는 이것만으로는 사랑이 充分하지 않음을 말하고, 綜合的인 사랑을 要求했습니다. 몸과 物件을 준 것이 사랑의 한 部分이 되려면 사랑의 基本이 있어야 하는데, 그 基本은 마음입니다. 마음을 거기에 쏟아야 합니다. 中心을 거기에 쏟아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心情으로 物件도 주는 것이고 어려움을 當할 때 도움도 주는 것입니다. 그뿐더러 사랑은 믿음보다 貴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山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전 13:2). 또 사랑은 知識보다 貴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람의 方言과 天使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꽝과리에 不過한 것이라”(고전 13:1). 그런 사랑은 現實的인 것으로 重生과 同時에 變改된 靈魂의 技能이 發揮되는 始初부터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明確하게 認識함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榮光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 1:8)고 했습니다. 보지는 못하였으나 우리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안 본 사람,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對象이 되려면 그만큼 具體的으로 나에게 捕捉되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내가 예수를 알되 肉身으로 아는 式으로 알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사람이 눈으로 보는 式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가 아무 사람도 肉體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肉體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被造物이라 以前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6-17). 옛날에 예수님이 나사렛 예수로 다니실 때 肉體로 보고 안 사람도 - 그때 使徒들이 그러했지만 - 이때부터는 예수를 그렇게 알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實質上 存在라는 事實은 나사렛 예수로 땅에 와 계신 때나 只今이나 變함 없이 現實的이고 實質的이라는 말로서, 조금이라도 價値가 덜하거나 實存性이 薄弱하거나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中에 있다”(마 18:20)고 約束하신 대로 臨在하시는 事實이 얼마나 現實的으로 生生한 일입니까? 그것이 마치 몸으로 復活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弟子에게 나타나신 境遇(눅 42:13), 또 弟子들이 門 닫고 앉아 있을 때 거기 나타나셨던 境遇와 같은(요 20:19), 이러한 나타나심보다 덜 實質的이고 덜 實存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옛날이나 只今이나 變함이 없이 살아 계셔서 여러 가지 模樣으로 그 事實을 우리에게 證明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그분을 確實히 認識하기에 不足함이 없게 하십니다. 只今 살아 계시사 우리를 다스리시며 때에 따라 우리와 交通하시며 우리에게 豊盛한 恩惠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우리로서는 生生하게 認識하고 사랑하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只今 살아 계시사 우리와 關係를 맺고 계신다는 事實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고 自己 自身의 內部에서 明確하게 認識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認識이 없다면 내가 그리스도人으로서 참으로 내 속에 新生한 새사람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어 봐야 할 것입니다. 새사람이 있는 事實이 實證되어야 합니다. 罪에 對해서는 分明히 悲感이 생기고, 嫌惡가 생기고, 不安이 생겨서 이렇게 해서는 안 되겠다 하고 自然스럽게 反撥하는 힘까지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좇지 않고 利益이 더 크고, 肉體의 感覺이 크니까 그리로 뛰어들어가 그만 罪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속에 새사람은 처음부터 成人답게 充滿한 姿態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더라도 生命의 能力은 歲月의 흐름과 함께 더욱 明瞭하게 發揮되어 새사람은 더욱 長成하는 것이고 예수님께 對한 認識도 더욱 깊고 豊盛하게 되어 갑니다. 이런 것도 重生을 確認하기에 必要한 事實입니다.
重生했다고 말로만 하고, 理論으로만 重生했느니라 하면서 아무런 證據가 없다면, 이와 같은 狀態는 救援의 信仰이 아니고 知的 信仰, 所謂 歷史 信仰에 不過한 것입니다. 證據가 없는 信仰을 가진 사람은 人生을 살아가면서 많은 危機를 만나고 試驗을 當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많은 誘惑을 받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 對한 사랑이 强烈하다면 죽으나 사나 예수님만 依支하며 나가지 한눈팔거나 彷徨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彷徨한다고 해서 重生 안 한 것이라고 斷言할 수는 없지만, 萬一 自己 속에 새사람이 있고 그 새사람이 相當히 長成했다면 微微한 試驗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重生한 사람으로서 長成했다면 長成한 사람다운 健康한 行步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다가 조그마한 問題에도 쓰러지고 넘어진다면 重生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狀態가 恒常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어린아이는 젖이나 먹고 밥은 먹지 못합니다“(고전 3:2), 그 어린아이는 重生했을지라도 結果가 없을 때에는 했는지 안 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열매 없는 나무는 元來 찍어서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몇 番이나 열매 없으면 除하겠다고 했습니다(눅 3:9; 요 15:2; 마 7:19). 그러한 까닭에 重生한 사람의 마음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에 對한 사랑이 있고 그 重生으로 因한 새사람이 나올 때 靈魂의 技能의 變改에서 重要하게 일어나는 것은 意志의 變改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行하려는 意志가 생김
意志의 變改라는 事實을 빌립보서 2:13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行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自己의 기쁘신 뜻을 爲하여 너희로 所願을 두고 行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怨望과 是非가 없이 하라.” 여기 行한다는 말로, ‘에네르게오(      )’라는 單語를 썼습니다. 卽 너희 안에서 에너지를 供給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힘을 넣어 주시면서 움직여 나가신다. “不順從의 아들들 속에서 일하는 神이라”(엡 2:2)에서 ‘일한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너희 안에서 일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일한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힘을 供給하시면서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는 데, “自己의 기쁘신 뜻을 爲하여 너희에게 所願을 두고 行하게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을 다 썼습니다. 나에게 所願을 두고 行하게 하신다는 것은 내가 所願을 가진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려고 하는 所願이라는 것입니다. 自己의 慾心을 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行하려는 所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所願이 안 생겼거든 重生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重生했다면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기고, 거기에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면 기쁘시게 못 하는 것입니다. “나더러 主여 主여 하는 자마다 天國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行하는 者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여기서 重生의 重要한 結果가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天國에 들어갈 사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行하려면 그 뜻을 알아야 하며, 그 것을 行할 수 있는 能力이 있어야 하고, 行할 마음이 있어서 하고자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안다 해도 能力이 없으면 못 하는 것이고, 아무리 能力이 있어도 行하고자 하지 않으면 못 하는 것입니다. 能力이 많이 있어도 特別히 거기에 置心하지도, 해 보려고도 안 하니까 못 하는 것입니다. 勿論 知的 判斷으로 하나님께 對한 神秘한 事實을 깨닫는 것은 重生한 것을 證示하는 重要한 證據가 되지 않습니다. ‘깨달았다’ 하는 것이 어느 程度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았다고 하는데 一旦 危機가 臨할 때 그 안다는 것이 確信으로 그를 붙들어 주는 일이 없다면 所用이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人生의 問題나, 아니면 些少한 것이라도 個人的인 危機가 臨했을 때 그 危機를 어떻게 處理하는가를 보아서 그 사람이 얼마나 깨달았는지의 與否를 아는 것이지 聖經의 內容을 잘 要約해 가지고 다니는 것만으로는 큰 意味가 없습니다. 一旦 問題가 있을 때 原則위에 確乎히 서서 조금도 讓步하지 않고 딱 서는 사람인가 아닌가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敎會가 그 동안 하나님 말씀을 많이 듣고 많이 먹은 것 같은데 많이 먹었는가 어떤가를 只今은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個人的인 危機가 있을 때에는 虛妄하게 넘어가는 것을 때로 보는 까닭입니다. 特殊한 使命을 생각하기 前에 이 敎會에 必要한 것은 가장 基本的인 基督敎부터 바로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重生했는가? 重生에서 要求하는 것은 이런 것이고, 이런 데서 出發해서 長成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고로 重生의 確實한 열매를 우리가 낸다는 것이 重要한 問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依支했으면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依支한 대로 새로운 生命을 주리라”고 하셨으니 그걸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믿어서 새로운 生命이 있다는 것을 自己가 生活 가운데 證驗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 온 敎友들은 特別히 그것에 置心하셔야 합니다. ‘내가 重生을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生命이 와 있는가 卽 나를 새로 만들어 주셨는가’ 이것은 改過遷善이 아닌, 내 속에 새로 創造해 주신 事實입니다. 이렇게 새 生命이 있는가 없는가를 내 生活 가운데서 證驗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 믿는 것도 實力 있는 것이고, 實質的이고 空虛한 宗敎 感情이 아니라는 事實을 알게 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生活이지 한 宗敎 運動이 아닙니다. 基督敎라는 宗敎를 만들어서 거기 들어가서 宗敎인 노릇 하라는 것이 아니라, 自己 生活을 그리스도的인 새 生命으로서 하라는 것입니다.
새 生命으로 살면서부터는 萬事를 重生의 터 위에서 하는 것입니다. 前에 親舊도 많이 사귀고, 일도 많이 하고, 對話도 많이 했지만, 重生한 사람은 重生한 그때부터 그 터 위에서 모든 것을 接觸하기 始作하는 것입니다. 그때 무슨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인지에 對해서는 자꾸 배워 가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아!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합니다. 이와 같은 생각은 過去에 어떤 나라나 民族을 中心으로 流行하던 思想도 아니고, 또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思想도 아닌 하나님 나라의 思想에 確乎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새 敎友들은 그런 것을 배워서 앞으로 長成하는 것이 大緞히 重要하지만, 이미 오래된 敎友들은 重生 自體부터 自己가 反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참으로 마음 가운데 사랑하고 있는가를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깨달았다면, 깨달았다는 事實을 어떤 生活이나 行爲로 表示하는가? 나에게 하나님의 뜻을 行할 마음의 所願이 있는데 그 所願이 具體的으로 ‘이 뜻은 이것이니까, 이렇게 간다’고 하여 그 行進으로써 그것을 表示해야 합니다. 그냥 所願을 가졌다는 것은 始作에 不過할 뿐입니다. 그것은 重生했을 그 當時의 狀態, 世上으로 가던 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向하던 때의 始初의 狀態이고,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進行했는 가를 우리가 다 證明해야 합니다. 5年 믿었으면 5年 동안 進行한 經過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祈禱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 저희에게 그 아드님 안에 있는 生命 곧 永遠한 生命을 주셨고 새 被造物로 하나님의 子女로 이 世上에 살게 하신 恩惠를 만만 感謝하옵나이다.
聖神을 內住케 하사 저희 各人으로 하여금 聖神을 依支하여 새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신 恩惠를 感謝하옵나이다. 그러하오나 저희는 罪人이요 軟弱하고 不足한 人間들이 오며 잘못이 많사오니, 이제 우리 救主 예수 그리스도의 功勞를 보시고 저희 罪를 赦하여 주옵시며 저희를 淨潔케 씻어 주옵소서. 主님, 저희에게 새 生命을 주셨사오니 이로써 새사람이 저희에게서 確實히 나타나는 生活을 해야 하겠나이다. 하나님께로서 出生한 者답게 그리스도의 品性으로 行하며 그 品性을 드러내야 하겠나이다. 또한 저희가 땅에 居하는 까닭이 그리스도를 證據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證示하기 爲한 것이요 결코 自己가 人生의 길을 스스로 經營하는 것이 아님을 主께서 저희로 하여금 알게 하셨나이다. 사랑해 주시는 아버지, 저희 各人을 붙드사 各사람이 穩全히 主의 것 답게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가 各各 穩全히 天父님의 榮光만 爲하여 쓰이게 하옵시고, 그렇게 하시는 主의 聖神을 穩全히 좇아 行하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힘이 없고 자칫 제 힘을 依支하기가 쉽사옵나이다. 저희를 불쌍히 여기사 主의 神을 全的으로 依支케 하시고 聖神을 좇아 行하게 하옵소서. 그렇지 않고서는 肉體의 所欲을 벗어날 수가 없나이다. 저희를 새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主 예수님의 이름으로 祈禱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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